신화위크│리즈시절부터 흑역사까지, 신화 인생 그래프
<div class="blockquote">14년은 분명 긴 세월이다. 4번의 월드컵이 열렸으며, 초등학교에 입학 한 아이가 재수를 해도 대학에 입학할 시간이다. 그러니 14년 동안 신화가 부침을 겪은 만큼 멤버들 역시 희극과 비극을 오가는 인생을 살아온 것은 당연한 일이다. 데뷔부터 오늘까지, 신화 멤버들의 인생을 그래프로 정리해 보았다. 외모가 빛을 발하던 시절, 작품이 흥행하던 시기, 활동조차 어려웠던 무렵은 각자의 인생사인 동시에 신화의 미시사로 기록된다. 그리고 이를 통해 과거를 분석하는 것은 결국 미래를 설계하기 위한 마음의 준비다. 겹쳐놓은 여섯 개의 그래프를 통해 드러나는 신화의 운명 곡선은 올해 어떤 방향으로 뻗어 나갈지, 미분과 적분을 동원해 각자 수치를 계산해 보는 것도 좋겠다.
리즈시절: 리더라는 직책이 무색하게 늘 전력을 다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던 에릭의 태도가 변하기 시작한 것은 6집 ‘너의 결혼식’부터다. 폭풍처럼 영어랩을 쏟아내며 무대 중앙을 장악하는가 하면 쉴 틈이라곤 없는 안무도 적극적으로 소화해냈다. 이후 신화가 SM과 결별 수순을 밟을 때 빛을 발한 에릭의 리더십이 그 싹을 틔운 시절이기에 더욱 중요한 지점이라 할 수 있겠다. 제 2의 전성기: “타는 냄새 안나요?”라는 대사 한마디로 에릭은 멤버들 중 가장 높이 날아 오른 스타가 되었다. MBC <불새>의 성공은 라는 유행어를 배출시킨 인터넷 통신망 CF를 비롯해 십수 개의 광고로 이어졌으며, 이듬해인 2005년 한해에만 드라마 <신입사원>과 영화 <6월의 일기>, <달콤한 인생>이 공개되었다. 에 출연해도 SBS <무적의 낙하산 요원>, MBC <케세라세라>, KBS <최강칠우> 등 나쁘지 않은 캐릭터들이 줄을 이었다. 흑역사: 소집해제 후, 에릭은 KBS <스파이 명월>을 복귀작으로 선택했다. 그러나 안티 히어로를 주로 연기하던 그는 톱스타 캐릭터에 완전히 녹아들지 못했고, 드라마의 만듦새는 허술했으며, 상대 배우는 잠적해 버리기도 했다. 심지어 이 무렵 시작한 트위터는 결정적으로 대중이 그를 비난하게 하는 원인을 제공했다. 연애사실을 공개할 정도로 늘 솔직하게 말해왔지만, 세상은 때로 침묵을 원하기도 한다. 날아 오른 불새가 처음으로 날개를 접게 된 것이다. 올해는: 리더로서 신화를 다시 뭉치게 했다. 그리고 앨범의 작곡과 프로듀싱에도 참여를 했다. KBS <승승장구>에 나와서는 차분한 말투로 팀의 위기를 고백하고, 멤버들에게 고마움을 전했으며 JTBC <신화방송>에서는 천진난만한 목소리로 “육릭”을 외쳤다. 지난 세월동안 학습한 모든 얼굴이 며칠 사이에 장소를 바꿔가며 드러났다 사라진다. 유난한 그룹의 유일한 리더로서 드디어 멀티플레이어가 된 것이다.
리즈시절: 3집 와 4집 는 전진의 매력을 극대화한 결과물이었다. 이후 KBS <출발 드림팀>에서 활약하며 인지도를 넓힌 전진은 당시 아이돌 그룹으로서는 드물게 단독으로 스포츠 웨어 CF를 찍으며 인기의 정점을 기록했으며 광고 수익을 멤버들과 6등분 해 나눠가졌다는 사나이의 일화를 남겼다. 제 2의 전성기: 솔로 1집을 발표한 전진은 타이틀곡 ‘Wa’가 에 사용된 덕분에 코믹한 이미지를 구축하게 된다. ‘SF 만화 주인공 이미지’로 출발한 아이돌이 무대에서 노래와 랩, 춤을 혼자 책임질 수 있을 만큼 성장했다는 사실이 가려지기는 했지만 이 무렵 SBS <야심만만>과 MBC <우리 결혼 했어요>, <무한도전>에 합류하는 등 예능 프로그램과 전진의 시너지는 확실히 효과적이었다. 남성팬들이 부쩍 증가한 시기이기도 하다. 흑역사: 다방면에 걸쳐 방송에서 활약해 온 전진이지만, 정극연기만큼은 그에게도 어려운 도전이었다. KBS <구미호 외전>과 SBS <해변으로 가요>가 연이어 부진한 성적을 기록하면서 전진은 특유의 쾌활한 이미지를 유지하는 데에도 실패했다. 다만, 그의 아버지인 찰리 박은 방송 출연을 거듭하며 2005년 <카사노바 사랑>이라는 앨범을 발표하기도 했다. 올해는: 군복무를 마치자 일각에서 그의 <무한도전> 복귀를 거론할 정도로, 전진의 쾌활한 청년 이미지는 강력한 것이다. 심지어 <신화방송>에서 그는 땀을 뻘뻘 흘리며 게임에 참여하고, 운전을 하면서 멤버들의 별명을 지어주는 등 녹슬지 않은 예능감을 드러내기도 했다. MBC <황금어장> ‘라디오스타’에서 MC들의 공작에 밀리지 않는다면 또 한 번 예능계의 블루칩으로 부상할 수 있을 것이다.
리즈시절: 여자 아이돌의 루즈삭스만큼이나 ‘T.O.P’시절 김동완의 하얀 헤어피스는 청순함의 상징이었다. 부리부리한 눈과 단정한 입매가 소년의 해사함 속에서 절묘한 조화를 이루던 그 시절의 김동완은 무려 ‘꽃미남’으로 이름을 날렸으며, 이 시기는 이후 3집부터 이어진 삼촌근육의 나날에 비해 너무나 짧기에 더욱 아련하다. 제 2의 전성기: MBC <목표달성 토요일>의 ‘애정만세’에 출연한 김동완은 이성진과 함께 ‘주접’이라는 새로운 예능의 장르를 개척했다. 뿐만 아니라 그는 특유의 장난스러움을 보여주었음에도 불구하고 꽃님이의 최종 선택을 받아 실없는 이미지를 탈피했다. 이 무렵부터 시작한 라디오 DJ는 그에게 속 깊은 오빠의 캐릭터를 더해주었으며, 2005년 KBS <슬픔이여 안녕>으로 연기력을 인정받고 소화제 드링크 CF를 찍을 때까지 그러한 이미지는 유효했다. 흑역사: 놀림의 레퍼토리가 된 영화 <돌려차기>는 사실 흥행 성적을 제외하면 김동완에게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오히려 배우로의 가능성을 증명한 후 출연한 <사랑하는 사람아>에서 김동완은 인상적인 순간을 만들어내지 못한다. 그 무렵 발표한 솔로 1집의 ’손수건‘마저도 유쾌하고 건강한 김동완의 느낌을 반영하지 못한 곡으로 별다른 반응을 이끌어내지 못했다. 연기도, 노래도 잘 하지만 그것을 어떻게 보여주어야 할지 모르던 시절이다. 올해는: 지난해부터 김동완은 과 MBC 특집 단막극 <절정>으로 캐릭터의 외연을 넓혀나가고 있다. 비록 <신화방송>에서는 피곤에 지쳐 낮잠에 빠져드는 모습을 보이고 말았지만, 체력이 좀 뒤쳐지면 어떤가. 연기력에서는 신화 최고의 연기력을 쌓았는데 말이다.
리즈시절: 신화 2집의 성공 비결은 안무에 있어서 정체성을 확고히 한 덕분이었다. 그리고 안무에 관한한 가장 영향력을 발휘한 이민우는 그 중심에 있었던 인물이다. 여기에 은색으로 염색한 헤어스타일과 뮤직비디오에서 보여준 터프한 이미지는 그를 단숨에 동경의 대상으로 만들어 버렸다. 외모와 달리 다정한 팬서비스에 후한 성격도 그의 인기에 한 몫을 했다. 제 2의 전성기: KBS <산장미팅 장미의 전쟁>은 이민우의 진지하면서도 로맨틱한 면모를 전면에 드러낸 프로그램이었다. 윤정희를 비롯해 많은 여배우들의 실제 데뷔 방송이기도 했던 이 프로그램에서 이민우는 한창 날렵했던 턱선과 매력 어필에 빠지지 않는 댄스로 많은 인기를 모았다. 흑역사: 또 한 번의 연애 버라이어티는 그에게 실연과 시련을 안겨 주었다. KBS <해피 선데이> ‘꼬꼬관광 싱글싱글’에 출연한 이민우는 방송을 통해 만난 에이미와 공개 연애를 선언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이별 후에도 오랫동안 언론을 통해 감정을 드러내는 등 좀처럼 이슈의 전환을 맞이하지 못했다. 올해는: 전방위적으로 활동하는 다른 멤버들에 비해 이민우는 비교적 음악과 무대에 집중해왔다. ‘엠쌀로’라는 희대의 별명을 탄생시켰던 솔로 앨범을 통해 작사, 작곡, 프로듀싱을 갈고 닦은 그는 새롭게 발표되는 신화의 10집 앨범에서도 창작자로 큰 몫을 해냈다. 앨범의 성패가 뮤지션 이민우의 다음 행보를 결정짓는 한 수가 될 것이다.
리즈시절: 야자수 머리만 하지 않는다면, 신혜성은 언제나 평균 이상의 인기를 구가하던 멤버다. 새침한 외모와 리드 보컬이라는 포지션, 의외로 터프한 성격의 조합은 언제나 소녀들에게 매력적인 법. 2001년 이지훈과 함께 발표한 ‘인형’까지 히트시킬 정도로 금발 머리의 신혜성을 향한 팬들의 지지는 절대적이었다. 제 2의 전성기: SBS <연애편지>는 신혜성의 예능감을 가장 적극적으로 활용한 방송이었다. 신정환과 티격거리거나 멤버들과 대립하는 상황을 통해 신혜성은 특유의 새침한 분위기를 더욱 강조했지만, 한편으로는 을 추며 대중적인 인지도를 높인 시절이기도 하다. 생각해 보면 특별할 것도 없는 동작이었지만, 신혜성의 곤란해 하는 표정이 더해져 미묘한 매력을 발휘했던 춤이다. 흑역사: 솔로 앨범으로 가장 큰 성과를 거둔 멤버는 아무래도 신혜성이다. 2007년도 ‘첫사람’으로 골든 글로브 시상식에 참여하게 된 신혜성은 심지어 해 내며 무르익은 가창력을 과시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어 음주 운전 사건과 도박 사건이 불거지면서 그의 솔로 활동에는 장막이 드리워지게 되었으며 대중의 관심은 멀어져 버렸다. 가능성이 가득했기에, 더욱 안타까운 시절이다. 올해는: <신화방송>에서 가장 의외의 선전을 보여 준 사람은 다름 아닌 신혜성이다. 전진의 에너지를 정면으로 받아치면서 적극적으로 상황에 뛰어드는 그는 신화 예능의 새로운 블루칩. 다만 15세 미만 청소년과 어린이들은 그의 얼굴을 모를 수 있으니 인지도 확립을 위해 무대에서는 이왕이면 센터에 서 있는 센스를 발휘하자.
리즈시절: 아이돌 그룹의 막내만큼 이미지 변신을 꾀하기 어려운 위치도 없다. 형들의 뽀뽀를 먹고 자란 앤디는 특히나 오랫동안 나이보다 귀여운 이미지를 유지하던 멤버다. 심지어 예능 프로그램에서도 앤디의 개인기는 귀여운 이었다. 그런 그에게 MBC <우리 결혼했어요>는 남자가 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으며, 요리에 익숙하고, 부모님께 잘하는 그의 어른스러운 모습은 많은 주부팬들을 양산해 내기도 했다. 제 2의 전성기: 모든 아이돌에게 군복무는 공백기라는 위기를 초래하기 마련. 그러나 앤디는 미국 영주권을 포기하면서 현역 복무를 선택한 덕분에 오히려 입대를 통해 남성들의 호감을 얻었다. 게다가 그가 입대 전부터 프로듀싱한 그룹 틴탑은 신화가 제작에 참여한 아이돌 중에서 가장 큰 성공을 거두고 있다. 흑역사: 4집 앨범당시 신화는 5인체제로 활동을 했다. KBS <승승장구>에서 밝힌 것처럼 어머니의 병간호 때문에 가수 생활을 잠시 접어야 했던 그때, 신화는 하필 ‘Wild Eyes’의 의자 안무를 통해 뛰어난 팀워크를 선보였고, 앤디의 빈자리는 무대 위에 남아있지 않았다. 그룹의 역사에서 자신의 이름이 지워진 페이지가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분명 가슴 아플 일이지만, 이 당시 신화가 누드 사진집을 출판했다는 사실은 큰 위로가 될 것이다. 올해는: 앤디가 육상대회를 비롯해 하며 뒷바라지를 한 덕분인지, 드디어 틴탑은 ‘미치겠어’로 가요프로그램 1위를 달성했다. 신화 멤버들과 함께 있을 때는 신기하리만치 다시 막내의 모습으로 돌아가지만, 제 2의 이수만 프로듀서에 가장 가까이 다가가고 있는 멤버가 앤디인 것만은 분명하다. 그러니 틴탑의 행보를 주목하는 것이 앤디의 성장을 확인하는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10 아시아>와 사전협의 없이 본 기사의 무단 인용이나 도용, 전재 및 재배포를 금합니다. 이를 어길 시민, 형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10 아시아 글. 윤희성 nine@10 아시아 편집. 장경진 three@<ⓒ즐거움의 공장 "10 아시아" (10.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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