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부드러운 남자' 벤 버냉키, 새로운 말은 없었다.

낙관의 지속인가, 곤궁함의 침묵인가?

[아시아경제 이공순 기자]버냉키 미 연방은행 총재는 지금은 전설이 된 자신의 2002년 논문에서 일본의 '헤이세이 공황'을 평가하면서 "일본 중앙은행은 디플레이션을 해결하는데 충분히 '대담'(bold)하지 못했고, 거기에는 일본 관료들의 저항도 한 몫했다"고 썼다. 그가 '헬리콥터 벤'이라는 애칭으로 불리게 된 것은 바로 그의 이같은 이론적 소신에서 비롯된 '대담한' 정책들 때문이었다. 그가 지난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아낌없이 시장에 퍼부은 수조 달러는 그의 이론적 대담함을 웅변하고도 남음이 있다. 그러나 전세계가 주목했던 26일(현지 시각)의 연례 잭슨홀 컨퍼런스에서 버냉키 총재는 다소곳하기 이를데 없었다. 달라스 연방은행 전임 총재이자 정책분석을 위한 전국센터의 연구원인 로버트 맥티어는 "우리는 '허리케인 벤'이라기 보다는 '신사 벤' 의 이야기를 들었다"고 평했다. 시장의 기대와는 달리, 버냉키 총재는 지난 9일의 공개시장위원회(FOMC)에서 결정된 사항을 다시 열거하는 것 이외에는 아무 것도 새로운 것은 말하지 않았다. 그는 연준은 "현재의 코스에 계속 머무를 것이며, 9월 20, 21일 이틀간에 걸쳐 열리는 차기 공개시장위원회에서 필요하다면 추가적인 초치를 논의할 것"이라고 말한 것이 전부였다. 여기까지는 어차피 대부분의 전문가들이 예상한 대로였다. 스프링거 파이낸셜 어드바이저리의 회장인 케이스 스프링거는 이날 CNBC와의 인터뷰에서 "버냉키는 공포 카드를 쓰지 않았고, 경제에 또 한번의 양적완화 프로그램을 던지지도 않았다"며 "만일 경기부양책이 필요하다면 버냉키는 이를 시행할 것이기 때문에 오늘의 무정책에 투자가들은 만족할 수 있고, 이는 궁극적으로 투자가들에게 신뢰를 심어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단순한 말' 뒤의 속내는 생각보다 복잡할 수 있다 . 우선 지난 며칠 동안 연준의 입장을 대변한 것은 필라델피아 연준 총재 플로서나 캔자스시티 연준총재인 핏셔와 같은 지난 공개시장위원회에서 제로금리 정책의 2년 연장에 반대표를 던진 인사들이었다. 플로서 총재는 25일 버냉키의 잭슨홀 연설 직전 CNBC와의 인터뷰에서 "연방은행이 무엇을 무서워하는지 모르겠다"며 버냉키의 대담함의 이론적 근거인 디플레이션 우려를 노골적으로 힐난했다. 경제는 궁극적으로는 회복될 것이며, 그 과정이 일직선적인 것은 아니며 굴곡이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는 또 "과연 지난해 8월의 제2차 양적완화가 경제에 도움이 되었는지 의문"이라고 꼬집었다. 반대표를 던진 지역연준 총재들이 지난 공개시장위원회 이후 계속해서 언론을 수놓는 동안, 찬성표를 던진 주류는 단 세차례 '경제가 기대보다는 안좋지만, 더블딥은 아닐 것"(더들리 뉴욕연준 총재)이라고 소극적인 발언을 한 것이 전부였다. 공개시장위원회의 표결에서는 이겼지만, 장외정치에서는 일방적인 수세였다. '합의'와 '외관'을 중시하는 연준에서 소수파의 의견이 이처럼 외부에서 적극적으로 개진된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추론해 보면, 지난 공개시장위원회 회의가 순탄치 않았으며, 마지 못한 절충책이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즉, 버냉키의 입지가 좁아진 것이다. 연준의 속사정만이 문제는 아니다. 연준, 특히 버냉키 총재를 향한 정치적 압박도 점점 세지고 있다. 유력한 공화당 대선 후보인 릭 페리 텍사스 주지사가 '한번만 더 돈을 찍어내면(추가 양적완화), 거의 반역죄에 해당"한다고 거친 말을 늘어놓는 것은 연준의 100년 역사에서 전례없는 굴욕이기도 했다. 그 바탕에는 연준이 찍어내는 돈이 은행가들만을 배불리고 실물경제나 중산층에게는 오히려 손해라는 대중들의 분노가 깔려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이같은 정치적 압력이나 연준 내부의 이견 이전에, 버냉키 스스로 해결하지 못한 과제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는 이미 지난 7월 초 하원 청문회에서 상반기의 급작스런 경기 침체가 '이상한'(strange) 일이라며 더 이상 해명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연방은행이 할 수 있는 일은 다했다며 이제는 의회와 정치권이 나설 때라고 오히려 통화정책 이외의 '행정' 정책을 주문했다. 디플레이션 압력에 맞서 인위적인 인플레이션을 만들어내기 위해 무차별적으로 시장에 유동성을 공급(발권)하면 된다는 그의 이론적 틀에 한계를 간접적으로 인정한 첫 발언이기도 했다. 그런 탓에 금융시장의 떠들썩한 반응이나 언론의 호들갑과는 달리, 이미 버냉키 총재가 할 수 있는 '행동'(정책)은 없고, 그가 어떻게 시장을 안정시킬 수 있는 '말'을 하느냐에 분석가들의 초점은 이미 맞추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 '말'은 말의 내용이라기 보다는 '말'을 하는 방식, 즉 연준의 전통적인 정책 조처 중의 하나인 커뮤니케이션 스킬을 어떻게 구사하느냐가 관건이었던 셈이다. 그가 취한 전략은 아무 것도 새로운 말은 하지 않음으로써, 혹은 문제나 쟁점이 될만한 것은 어떠한 것도 당장은 시도하지 않음으로써 연방은행이 경제를 낙관하고 있고, 그 낙관에 시장이 동참하도록 유도하는 것이라고 풀이할 수 있다. 이같은 전략에는 두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연준으로서도 경제가 어느 방향으로 갈지 아직 확신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지역연방은행 총재인 플로서나 더들리 등은 지난 한 주동안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경제가 다소 불안하기는 하지만 더블딥으로 빠져들지는 않을 것이라고 언급했다. 플로서는 이날 인터뷰에서 불황에 빠질 확률은 20%라고 보았다. 그러나 이미 대부분의 민간경제연구기관들은 올해 하반기와 내년의 성장률 전망을 0.5-1.5% 수준으로 낮추었고, 오늘 발표된 2/4분기 GDP 성장률 수정치도 1.0%에 머물렀다. 올 상반기 성장률이 고작 0.7%에 불과한 것이다. 게다가 노동시장과 주택시장은 침체에서 벗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 것으로 이미 확인되고 있다. 연방정부 산하 주택공사인 페니매와 프레디맥은 여전히 부실 모기지 대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연방정부에 각각 수십억 달러씩의 자금지원을 요청했고 뱅크오브아메리카는 2008년 인수한 메릴린치와 컨추리와이드 은행의 주택 부실대출로 긴급 자본금 충당이 필요한 지경에 이르렀다. 노동시장은 명목상의 실업률은 9.1%로 낮아졌지만, 고용률은 계속 하락하고 있다. 지난달에는 노동생산성과 소비증가율이 모두 마이너스로 돌아섰고, 정부의 국채발행 상한 논란이 겹쳐 소비심리는 계속 위축되고 있는데 여전히 물가 압력은 계속되고 있다. 국가 부채 증가 때문에 정부의 재정정책에 기대기도 어렵다. GDP 내역을 살펴보면 지난 3분기 연속으로 정부 지출은 GDP에 마이너스 요인으로 작용했다. 3/4분기에 갑자기 상황이 호전될 근거는 보이지 않는다. 연준이 이런 사정을 모를 리 없다. 아니면, 스스로가 설정해 놓은 경제논리에 빠져서 헛된 낙관을 하고 있다고 평가할 수밖에 없다. 두 번째 가정은, 사실은 경제가 상방일지 하향일지 이미 짐작은 하고 있지만, 그것에 대응할만한 마땅한 전략이 없는 탓일 수도 있다. 지난 3년동안 정부와 연준의 '정책'에 조건반사화된 금융시장이 조그마한 정책의 변화에도 과도하게 반응하도록 이미 구조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번 공개시장위원회와 잭슨홀 미팅을 앞두고 주식시장과 채권시장이 급등락을 거듭했던 것도 바로 이처럼 정책 민감성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시장의 자생력이 약화되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며, 연준이 그동안 취해왔던 정책 원칙인 '선제적'(pre-emptive) 조처가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결국 가장 중요한 발언은 그가 하지 않은 말 속에 있다. 먼저, 버냉키는 두번의 대규모 자금 공급(2조3천억 달러)에도 불구하고 경제가 미약하게밖에 반등하지 않는 이유를 이번에도 설명하지 않았다. 지난 9일의 공개시장위원회 성명에서도 이 부분은 누락되어 있었다. 다만 일본의 대지진으로 인한 생산 지장등의 일회적인 사건 만으로는 설명이 안된다고 지적했을 뿐이다. 특히 두번째 양적완화(6000억 달러)가 본격화된 1/4분기에 GDP 성장률이 0.4%에 머무른 이유를 연준의 그 누구도 명확하게 제시한 바 없다. 적어도 이 부분에 대한 논리적 해명과 공개시장위원회 멤버들간의 합의가 이루어지기 전까지는 '대담한'(bold) 조처는 쉽지 않을 것이다. 버냉키의 두번째 전략은 이런저런 이론적 해명들과는 무관하게 경제가 악화되어, 상황에 의해 연준이 행동을 취할 수밖에 없는 때를 기다리는 것이다. 말하자면 '위기'가 정당화시켜주는 정책을 펼치는 것이다. 어느 쪽이든 그는 기다릴 수밖에 없다. 핌코의 짐 로저스가 말한 것처럼 지금 금융시장은 연 3% 이상의 성장에 맞춰져 있다. 플로서 총재 등의 매파는 그 기준을 2.5%로 잡고 있다. 3/4분기 성적표가 그 아래선을 가리키는 때, 시장은 비명을 지를 것이고 버냉키는 다시 한번 '대담'해 질 수 있을 것이다. 이 모든 서로 상충되는 조건 속에서 버냉키는 사실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말이었다. 이공순 기자 cpe101@<ⓒ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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