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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正歌'의 끝을 잡고…오늘도 느릿느릿 읊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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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무형문화재 가곡 보유자 이동규 명창 인터뷰
2일 서울돈화문국악당서 '일소당 음악회' 무대 올라
5대째 이어온 국악 명문가 후손…가곡에 바친 60년 회고
한의 정서 담은 판소리와 달리 가곡은 궁중서 부르던 맑은 음색의 詩

[아시아경제 김희윤 기자] “벽사창이 어른거려 임 오신 줄 알고 뛰어나가 보니 님은 아니 오고 달밤 가득한데 벽오동 젖은 잎에 봉황 와서 깃 다듬는 그림자구나. 마침 밤이라 다행이지 낮이었으면 비웃음당할 뻔했구나.”


너였다가, 너일 것이었다가 오지 않는 너를 기다리는 황지우의 시 ‘너를 기다리는 동안’ 속 화자를 보듯, 남창가곡 벽사창(碧紗窓)은 기약은 없지만, 틀림없이 오겠노라 약속한 임을 연모하는 절절한 마음을 노래한다. 국악에서 우리가 흔히 듣는 노래는 민간에서 불린 속가(俗歌) 판소리다. 궁중에서는 고상하고 바른 노래라는 의미의 정가(正歌)를 불렀다.


거친 음색이 두드러지는 판소리가 한의 정서를 품고 있다면, 정가는 아름다운 시를 맑고 깨끗한 음색으로 부르는 것이 특징이다. 지난해 국가무형문화재 ‘가곡’ 보유자로 지정된 이동규(74) 명창은 2일 서울 돈화문 국악당에서 진행되는 ‘일소당 음악회’를 앞두고 연습에 연습을 거듭하고 있었다. 60년 가까운 세월 동안 가곡에만 매진해왔지만, 그는 아직도 부족하다며 웃어 보였다. 그는 5대째 정가의 맥을 이어온 국악 명문의 후손이자 국악계를 대표하는 가객으로 지금도 무대에 올라 우리 가곡을 알리는 현역으로 맹활약 중이다. 다음은 이 명창과의 일문일답.


'正歌'의 끝을 잡고…오늘도 느릿느릿 읊조린다 1958년 무렵부터 가곡을 배워 60년 이상 가객으로 살아온 이동규 명창은 지난해 국가무형문화재 제30호 ‘가곡’ 보유자로 지정됐다.[사진제공 = 국립국악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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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곡이라고 하면 보통 서양 가곡을 생각하는 대중이 많다.


= 안타까운 일이다. 일제강점기에 서양음악이 들어오면서 이름 붙인 것이 대중화되면서 가곡에 대한 정보가 서양식 가곡에 한정됐는데, 본래 가곡은 조선시대 궁중과 사대부 계층에서 부른 곡으로 가사와 시조를 함께 아울러 정가라 불렸다. 가곡은 현악기와 관악기로 편성된 실내악 반주에 맞춰 시조를 노래로 부르는 성악곡으로 현재 남창 가곡 26곡과 여창 가곡 15곡이 전승되고 있다.


▲반세기 넘게 가객으로 살면서 느낀 우리 가곡의 매력은 무엇인가.


= 마음이 편해진다. 부르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 모두가. 가곡은 목을 쓰는 기교가 철저하게 절제된 음악이기 때문에 청아하고 맑은 소리를 내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수련이 필요하다. 군자의 도착이 수신(修身)을 중심으로 하듯 우리 가객 역시 자신을 갈고닦으며 안분지족의 검소한 정신과 관조의 세계를 노래해야 깨끗한 소리를 낼 수 있다. 일례로 맑은 하늘에 구름 한 점 둥실 떠다니는 가사를 노래하면 내 몸이 둥실 떠오르면서 세상을 내려다보게 된다. 떠다니며 느끼는 영감이 소리에 스며들기도 하고. 또 가곡은 느림의 미학을 품고 있다. 서양음악에서 쓰는 메트로놈으로도 그 박자를 잡지 못할 정도니까. 그 속에 문학과 음악이 완벽한 조화를 이룬다. 이런 점에 매력을 느꼈고, 또 세계인들 또한 이 같은 예술적 완성도를 인정해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도 등재된 점이 자랑스럽다.


▲5대째 이어온 국악 명문가의 후손인데, 선조들께선 어떤 음악을 하셨는지.


= 고조부(이인식)께서는 헌종 때 궁중아악부에서 가전악, 고종 때 전악을 하셨고 증조부(이원근)는 고종 때 아악부 악수장을 지낸 정악계의 거봉이셨다. 조부(이수경)는 이왕직 아악부의 아악수장을 지낸 거문고 명인이셨고 부친(이병성)은 천에 하나 만에 하나 나올까 말까 한목소리라 불린 당대 가곡 명창이셨다. 어렸을 때 할아버지께서 집에서 악기를 자주 만들곤 하셨는데 여섯 살 무렵부터는 그 옆에 앉아 명주실을 꼬며 자연스럽게 악기와 소리, 음악을 접하는 환경에서 성장할 수 있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자연스럽게 1958년 국악사양성소(국립국악고등학교의 전신)에 진학했고, 그 후로 오늘까지 가객으로 일생을 국악인으로 살게 됐다.


'正歌'의 끝을 잡고…오늘도 느릿느릿 읊조린다 국립국악원 무대에서 가곡을 노래하는 이 명창. 그는 공연에서 기계장치 보조없이 육성으로 노래하는 것으로 정평이 나있다. [사진제공 = 국립국악원]

▲그동안 섰던 공연 중 인상 깊은 무대를 꼽아보신다면.


= 모든 무대가 소중하고 의미 있었다. 기억에 남는 공연은 1973년 독일 순회공연 중 본에서 준비했던 무대다. 공연 준비 전 현지에서 섭외한 사회자가 마침 한국인이었다. 그가 공연 프로그램을 보고 가곡은 누가 하시나요? 묻기에 내가 한다고 하니 어떤 노래를 준비했냐고 해서 가곡 언락을 준비했다고 했다. 그러자 사회자가 유럽 사람들은 느린 곡을 좋아한다며 자신이 한국에 있을 때 가곡을 배웠다며 스승을 소개하는데 알고 보니 아버지 제자였다. 그의 제안으로 곡을 태평가로 바꾸고 가사를 되뇌는데 무대에 오른 그가 자신을 소개하자 객석에서 박수가 터져 나왔다. 재독작곡가 윤이상이 바로 그 사회자였다. 가곡에 정통한 사람이 클래식을 전공해 해외에서 인정받는 것을 보고 반가운 마음이 들었던 무대였다.


▲꼿꼿한 자세로 노래하는 무대 위 모습이 인상적인데, 힘들진 않으신지.


= 젊은 시절, 신혼일 때 부인이 내 공연을 보고는 다신 당신 공연을 보지 않겠다고 하더라. 그 눈에 비친 내 모습이 권투선수가 링에서 싸움하면 얻어맞는 것처럼 힘들게 노래하는 것 같다고.(웃음) 힘 안 들이고 어떻게 노래가 나올 수 있겠나. 그리고 사실 노래할 땐 그 음률에 빠져 부르다 보니 힘든 것도 잊고 몰입하게 된다. 잡념이 들어올 틈이 없다. 이게 힘들다면 가객이기를 포기해야지. 몰입의 힘, 그게 바로 업이 아닐까.


▲2일 오르는 일소당 음악회는 특별한 공연으로 준비했다던데.



= 옛날 돈화문로에 있던 국립국악원 내 작은 공연장 이름이 일소당(佾韶堂)이었다. 지금은 돈화문 국악당이 들어선 이곳에서 노래를 먼저 부르고 이어 그간 걸어온 가객으로서의 활동들을 관객과 이야기 나누는 토크쇼 형식의 공연을 준비했다. 평생을 국악인으로, 또 가객으로 살아오며 많은 일이 있었지만, 가곡이 차츰 대중에게서 잊히는 것이 가장 안타까워 될 수 있는 한 많은 무대에 서고자 한다. 나는 5대를 이어온 국악인이지만 내 자식들은 다른 일들을 하고 있다. 노래하는 것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것이 어려운 현실이 아닌가. 아쉽지만 도리가 없는 결정이었다. 대신 제자들에게 좋은 소리를 전수하는 것으로 위안 삼고 있다. 옛 선조들의 풍류, 그리고 느림의 미학을 담은 선율은 정가가 유일한만큼 오랫동안 이 문화를 전할 수 있도록 국가 차원의 관심과 지원이 필요한 상황이다.




김희윤 기자 film4h@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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