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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한 詩]가방의 부름을 받았다/이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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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큰 가방을 메고 걷는다 녹슬고 손때가 묻은 망치가 가방에 들어 있다 빵이 들어 있다 가방이 흔들릴 때 어깨끈을 잡아당긴다 가방이 등에 달라붙는다 그가 걸음을 멈추고 잠깐 라일락꽃 향을 맡는다 가방을 열고 마른 빵을 뜯는다 물을 마신다 그가 계속 걷는다 나무 막대기를 하나 줍는다 나무 막대기로 풀을 휘젓자 나비가 날아간다 이제 가방에 골목이 들어간다 묵은 김치찌개 냄새가 들어간다 고양이가, 떨어진 벽돌이, 광장에 있던 사람들이, 어린 병아리가, 뒷마당에 잘린 나무들이, 오동나무에 남은 물 한 줌이, 생선포를 뜬 것처럼 얇게 베어낸 나뭇결이, 나뭇잎 테두리에 있는 얼룩이, 홍수에 떠내려간 지붕이, 닭벼슬을 닮은 톱날이, 먹통이, 먹줄을 주는 그가 들어간다 바통을 받고 달린다 직진 길을 돌진한다 골목을 돌 때 넘어진다 까진 무릎에 흙과 피가 섞인다 나는 뼛가루가 있는 항아리를 받는다 안이 따뜻하다 소나무 밑에 계시는 아버지, 이제 짐을 푸셨나?



[오후 한 詩]가방의 부름을 받았다/이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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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아버지는 목수였나 보다. 그리고 망치와 톱과 먹통과 먹줄과 마른 빵과 마실 물이 다 들어갈 만큼 큰 가방을 매일매일 메고 다니셨나 보다. 그런데 그 가방은 그냥 큰 정도가 아니라, '골목도, 묵은 김치찌개 냄새도, 고양이도, 떨어진 벽돌도, 광장에 있던 사람들도, 어린 병아리도, 뒷마당에 잘린 나무들도, 오동나무에 남은 물 한 줌도, 생선포를 뜬 것처럼 얇게 베어낸 나뭇결도, 나뭇잎 테두리에 있는 얼룩도, 홍수에 떠내려간 지붕도' 마침내는 아버지 그 자신마저도 다 들어갈 만큼 정말이지 엄청나게 거대했나 보다. 아마도 저 큰 산만 했겠지. 아버지……, 얼마나 힘드셨을까. 채상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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