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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훈의 한국유사] 북한산성 전투의 미스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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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훈의 한국유사] 북한산성 전투의 미스터리 이상훈 육군사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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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0년 백제가 멸망하고 부흥운동이 일어나자 신라는 백제 부흥운동 진압에 주력했다. 그 결과 신라는 북쪽 변경에 힘의 공백이 생기고 말았다.


고구려는 호기를 놓치지 않았다. 말갈병을 거느리고 신라의 한강 유역 거점 성인 북한산성(北漢山城) 공략에 나섰다. 이것이 이른바 661년 북한산성 전투다. 고구려 장군 뇌음신(惱音信)이 말갈 장군 생해(生偕)와 함께 북한산성을 공격했다. 포차(抛車)로 성벽과 건물을 부수며 함락 직전까지 몰아붙였다. 하지만 어이없게도 고구려는 천재지변을 이유로 철수하고 말았다.


'삼국사기'는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이때 성 안에는 단지 남녀 2800명만 있었는데, 성주 동타천(冬陀川)은 어린이와 노약자를 능히 격려하여 강대한 적과 대적하기를 무릇 20여일 동안 하였다. 그러나 식량이 떨어지고 힘이 지쳐서 지극한 정성으로 하늘에 고하였더니, 갑자기 큰 별이 적의 진영에 떨어지고 또 번개가 치고 비가 내리면서 땅이 흔들렸다. 이에 적이 의심을 품고 두려워하여 포위를 풀고 돌아갔다."


북한산성 서쪽에 고구려군이 주둔하고 동쪽에 말갈군이 주둔해 북한산성을 동서로 포위했다. 당시 신라의 입장에서는 구원군을 보낼 형편이 되지 않았다. 북한산성은 고구려·말갈 연합군의 공격을 스스로 막아내야 했다.


고구려·말갈 연합군은 투석기로 성벽을 부쉈다. 성 안의 식량은 고갈됐다. 성이 곧 함락될 위기에 놓였다. 성 안에 있는 이들은 하늘에 기도를 드리는 수밖에 없었다.


이때 갑자기 큰 별이 나타나더니 고구려·말갈 연합군 진영에 떨어지고 천둥·번개를 동반한 소나기가 쏟아졌다. 예기치 못한 천재지변으로 고구려·말갈 연합군은 북한산성 포위를 풀고 철수하고 말았다.


삼국사기 기록으로 보면…

신라의 한강 유역 거점 북한산성, 西 고구려군·東 말갈군에 포위돼

투석기로 성벽 부수며 함락 직전 연합군, 천재지변 이유 급히 철수


'삼국사기' 기록을 그대로 따른다면, 함락 직전이었음에도 단순한 천재지변으로 고구려군이 물러난 상황이라고 말할 수 있다.


북한산성은 한강 북안에 위치한 광진구 아차산성(峨嵯山城)으로 비정되고 있다. 당시 북한산성에는 성주 동타천을 중심으로 남녀 2800명이 머무르고 있었다. 남녀라고 표현된 점에서 민간인이 상당수 포함돼 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동타천이 방어 성공에 따른 전후 포상으로 대사(大舍)에서 대나마(大奈麻)로 승급했으므로 신라의 대규모 구원군은 특별히 없던 듯하다.


북한산성 전투에서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은 바로 전투 결과다. 고구려·말갈 연합군이 단순히 천재지변만으로 스스로 포위를 풀고 물러났다는 점이다. 전투가 벌어진 음력 5월 말이면 장마를 전후한 시기다. 따라서 강한 소나기가 내리는 것은 그리 놀라운 일도 아니다. 오히려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이다.


신라의 구원군도 도착하지 않은 상황에서 단순히 천재지변만으로 물러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렵다. 당시 북한산성의 전략상 중요성을 감안하면 그냥 넘겨버릴 수 없는 대목이다. 고구려·말갈 연합군이 진짜 철수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이들은 과연 무엇을 의심하고 두려워한 것일까.

[이상훈의 한국유사] 북한산성 전투의 미스터리 북한산성 [사진= 연합뉴스 제공]

이와 관련해 '삼국유사'에는 조금 다른 정황이 드러난다.


"5월11일부터 6월22일까지 신라군은 매우 위태로웠다. 왕이 소식을 듣고 여러 신하와 의논했다. '어떤 계책이 있는가?' 왕은 망설이며 결정하지 못했다. 이때 김유신이 달려와 말했다. '형세가 위급하여 사람의 힘으로는 미치지 못하고, 오직 신술(神術)로써만 구할 수 있습니다.' 그러고는 성부산(星浮山)에 제단을 쌓고 신술을 닦으니, 갑자기 큰 독만 한 빛이 제단 위에서 나타나 별처럼 북쪽으로 날아갔다."


이어지는 내용은 북한산성 남쪽 하늘에서 갑자기 빛이 비치더니 30여군데의 포석(砲石)을 깨뜨렸다고 돼 있다. 상당히 설화적인 내용이지만 어느 정도 사실에 기반한 서술임을 추정해볼 수 있다. 경주는 북한산성의 남쪽에 위치하고, 북한산성은 경주의 북쪽에 자리 잡고 있다. 다시 말해 경주의 성부산에서 북쪽으로 날아간 빛이 북한산성의 남쪽으로부터 나타난 것이다. 빛의 방향성이 정확히 부합한다. 이는 김유신이 경주의 성부산에서 행한 신술과 북한산성에 발생한 사건이 서로 연관돼 있음을 시사한다.


북한산성에 갑자기 등장한 빛은 30여군데의 포석을 깨뜨렸다. 포석은 성벽이나 성루를 공격하기 위한 공성 무기로 투석기 혹은 발석차(發石車)라고도 한다. 갑자기 등장한 빛은 고구려군의 투석기 30여대를 부쉈고 그 과정에서 고구려 군사들이 땅에 쓰러졌다 한참 뒤 깨어났다고 한다.


삼국유사 미루어 보건대…

김유신, 위기상황 속 神術 계책…투석기 부대 급파해 판세 뒤집어

별처럼 날아간 원거리 공성무기 고구려군 투석기 30여대 깨부숴


'삼국사기'에는 "갑자기 큰 별이 나타나 적의 진영에 떨어지고 또 번개가 치고 비가 내리면서 땅이 흔들렸다"고 기록돼 있다. 이는 고구려군이 갑자기 등장한 빛 때문에 물리적 충격을 받은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즉 이 빛은 특정 목표에 충격력을 가할 수 있는 존재라는 게 분명하다. 게다가 투석기 30여대가 부서진 점에서 단순히 하나의 빛이라기보다 수십 차례 떨어진 빛으로 보는 게 자연스럽다.


갑자기 등장한 빛을 '신술'이 아니라 실제 무기로 볼 여지는 없을까. 당시 고구려군의 투석기는 북한산성 성벽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배치됐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에 상응하는 거리에서 고구려군의 투석기를 공격할 수 있는 무기는 그와 동일한 계열의 원거리 발사 무기였을 것이다.


'성부산'이라는 이름 자체가 별이 떠오른 산이라는 뜻이다. 별처럼 날아가는 원거리 발사 무기를 시험했을 것이라는 말이다.


신라에서는 문무왕대에 이르러 무기의 성능이 상당히 개선됐다. 그 과정에서 대형 노(弩)와 같은 우수한 무기가 개발됐다. 나당전쟁 직전 신라는 사거리 1000보의 대형 노도 제작할 수 있었다. 더욱이 신라에는 사설당(四設幢)이라는 특수한 공성부대가 있었다. 노당(弩幢), 운제당(雲梯幢), 충당(衝幢), 투석당(石投幢)이 바로 그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당시 신라의 투석기 개발 수준도 상당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고구려군의 투석기 30여대가 부서지고 고구려 군사들이 충격에 의해 쓰러졌다면 신라군은 적의 투석기만 집중적으로 공격할 수 있는 대형 투석기를 새롭게 투입했을 가능성이 있다.


신술이란 신묘한 술책이라는 뜻이다. 김유신은 북한산성이 포위된 상황에서 보통 사람들은 생각하지 못한 계책을 내놓았던 것 같다. 그리고 성부산의 제단 위로 나타난 빛이 '별처럼 북쪽으로 날아갔다(乃星飛而北去)'라고 한 점에서 이는 별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상대의 투석기를 파괴할 만한 원거리 발사 무기는 역시 투석기라고 추정할 수 있다. 김유신은 대규모 구원군 파견이 어려운 상황에서 소수의 투석기 부대 급파로 북한산성의 포위를 풀고자 꾀한 것이다. 당시는 야간에다 비까지 내리고 있었다. 따라서 고구려가 신라 구원군의 움직임이나 규모를 제대로 파악하기는 어려웠다.


장기간 포위로 고구려·말갈 연합군의 식량 사정도 좋지 않았다. 고구려군은 앞서 603년에도 북한산성을 공격했다가 신라의 구원군 파견으로 철수한 바 있다.


당시는 장마철이라 비가 내리는 야간이라면 적군의 감시를 피하기가 용이했다. 그러나 대규모 구원군을 보낼 여유는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발석차 부대를 선별해 북한산성으로 급파하는 방안을 제시하고 이에 대한 책임을 진 이가 바로 김유신이었던 것 같다.


결국 고구려는 악천후 속에서 신라의 투석기 부대가 증원되자 이를 신라의 대규모 구원군이 도착한 것으로 여겨 철수한 듯하다.


북한산성 전투 당시 천둥·번개를 동반한 소나기가 강하게 내린 것은 충분히 상정해볼 수 있다. 하지만 갑자기 나타난 큰 별 혹은 남쪽에서 나타난 빛은 고구려·말갈 연합군을 직접 공격했기에 다르게 접근해야 한다. 이는 신라의 투석기 부대가 투입된 것으로 볼 수 있으며 이에 대한 아이디어를 낸 사람이 바로 김유신이었다.


이렇게 해서 661년 북한산성 전투에 김유신이 직접 참가하지 않았지만 관련 일화가 과장·미화돼 사서 기록으로 남게 된 것이다.



이상훈 육군사관학교 군사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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