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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時代를 묻다]민주주의가 저물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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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단적 반대 속 혐오 얼룩진 정치
'내란 세력 척결' 몰두한 국정운영
사법부 압박과 침묵 번진 공직사회
사법 리스크 제거 위한 선택적 법치
편가르기 유발하는 무책임한 보복
관용·절제 회복해 민주주의 되찾길

[時代를 묻다]민주주의가 저물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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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는 가장 나쁜 제도다. 이때껏 있어왔던 모든 정치제도를 제외하면 그렇다." 윈스턴 처칠의 이 역설적 명언은 민주주의의 불완전함과 동시에 대체 불가능성을 정확히 짚는다. 그렇다. 민주주의는 늘 불만족스럽고 성가시며 느리다. 그러나 그 불편함이야말로 권력의 오만과 독주를 막는 안전장치다. 문제는 지난 1년, 한국 정치에서 이 안전장치가 급속히 해체되고 있다는 점이다. 처칠의 문장 앞부분만 남고 뒷부분은 사라지는 느낌이다.


대통령이었던 사람은 부인과 함께 감옥으로 갔고, 여러 혐의로 감옥에 보내려던 사람은 오히려 대통령이 됐다. 한국 정치가 극단적인 보복과 역전의 드라마를 연출하는 상징적인 일대 사건이다. 정권은 교체됐지만 정치의 언어는 더욱 거칠어졌고, 제도는 복수의 도구로 오염되고 있다. 전 국민에게 생중계되는 부처 업무보고에서 '도둑놈' '악질' 같은 표현이 대통령 입에서 거침없이 쏟아지고, 몇몇 언론은 제목으로도 내세운다. 국회를 비롯한 정치판의 용어가 요즘처럼 험악하고 거칠어진 적이 없다. 정치의 저질화와 공적 언어의 붕괴, 인격의 황폐화가 사회 전체를 뒤덮을까 봐 민망하고 씁쓸하다.


한국 정치는 급격히 방향을 틀었다. 극한 대립으로 국정을 마비시키던 입법부와 행정부는 어느 순간 한 몸처럼 움직인다. 민주주의의 기본 원칙인 견제와 균형, 국회의 존재 이유인 대화와 타협은 사실상 실종됐다. 야당은 스스로 무너질 듯 무력하고, 삼권분립의 마지막 보루인 사법부마저 노골적인 압박 속에서 위태롭다.


지난 정권의 과오가 컸다. 무엇보다 대통령제에 대한 몰이해가 낳은 극단적 결과가 시대착오적인 계엄이었다. 21세기 대한민국에서 결코 있어서는 안 될 일이었고, 준비조차 허술해 국가 위상의 추락은 물론 국민을 부끄럽게 했다. 시민의 신속한 대응과 계엄군의 조기 철수로 참사는 막았으나, 이번 사태는 절제 잃은 대통령 권력과 무모한 판단, 침묵하는 참모가 국가를 얼마나 쉽게 위기로 몰아넣는지 보여준 경고였다.


더 큰 우려는 현 정권의 국정운영 방식이다. '내란 세력 척결'이 최우선 국정과제가 된 듯 집요한 모습이다. 2시간짜리 계엄을 곧바로 '내란'으로 규정하여 정치 사회적 주도권을 잡는 데는 채 몇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행정부는 유명무실한 존재가 되고, 이재명 당시 대표와 더불어민주당이 정국을 주도했다. 지난 4월4일 탄핵심판 결정과 6월3일 대통령 선거 결과는 예상대로 나왔다. 이후 사법부를 향한 전방위 압박이 펼쳐진다. 위헌 논란에도 아랑곳없이 내란전담재판부 신설, 대법관 증원, 법원행정처 폐지, '법 왜곡죄' 도입 등이 속전속결로 추진된다. 조직과 인사, 예산의 독립이 무너진 데다가 대법원장과 특정 판사를 콕 찍어 공개 비난하는 행태는 사법부 길들이기를 넘어 삼권분립을 허물어뜨리는 소리다. 문화혁명 때 홍위병들이 이랬을까. 공포감을 누르고 법과 정의, 양심에 따라 재판할 법관이 얼마나 될까. 6·25 때 인민재판을 거부해 인민군이 물러날 때까지 산과 들에 숨어 끝까지 버텼던 부친 생각이 얼핏 든다.


설상가상으로 75만명의 공직자와 군·경을 상대로 한 광범위한 '내란 연루' 조사로 공직사회가 움츠러들고 있다. 눈치보기와 자기검열, 심지어는 서로 밀고하는 분위기가 형성될 조짐이다.


법과 원칙은 선택적으로 적용된다. 계엄 명령에 따랐다고 '정치 군인'이 되고, 대장동 항소 포기에 순응하지 않았다고 '정치 검사'가 된다. 보호받아야 할 재판관의 신상은 탈탈 털리고, 국가 공무원으로 당연히 공개돼야 할 대통령실 핵심 참모의 기초 이력은 꼭꼭 숨긴다. 민주 국가에서 이런 경우는 듣도보도 못했다. 정의의 여신 유스티티아가 눈을 가린 채 검을 손에 든 것은 내편 네편 가리지 않겠다는 뜻인데, 이 정권에서 정의는 편가름의 칼로 쓰이는가. 검찰은 민주적 통제라는 명분 아래 기소권과 수사권이 분리돼 사실상 행정부 산하기관으로 편입되고 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함께 존재해 왔던 검찰조직이 충분한 논의나 의견 수렴 과정도 없이 일순간 와해되고 있다. 무엇이 이리도 급한가. 권력 앞에서 휘어진 잣대는 민주주의의 뿌리를 직접 겨눈다.


이 집착의 목적은 분명하다. 다가올 선거에서의 유리한 지형 확보, 그리고 대통령 개인을 둘러싼 사법 리스크의 구조적 제거다. '내란 세력' 프레임은 국민을 선과 악으로 갈라놓고, 증오와 공포를 동원해 지지층을 결집시키는 손쉬운 방법이다. 외형적으로는 가장 효과적인 공동체 장악 수단이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진실이 꿈틀대고 가면은 벗겨진다. 더구나 '내란 몰이'가 1년 넘게 지속된다면 국민은 염증을 느끼고 여론은 돌아설 것이다. 새 희망과 비전 제시 없는 보복 척결 정치는 무능과 무책임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난제는 산적해 있다. 인공지능(AI) 강국을 위한 에너지 확보와 인재 양성, 북핵과 미·중 갈등 속 외교안보 전략, 대미 신뢰 회복과 통상 협상, 저출산 고령화, 공교육 부실과 사설 학원 난립, 국제경쟁력 약화 등등. 국정의 중심축이 증오와 처벌, 편가름에 머무는 동안 현재는 방치되고, 미래는 날아간다.


국회 역시 국민의 대표기관이란 자부심을 잃었다. 다수의 힘이 곧 정의가 됐고, 권력을 위한 맞춤형 입법 제조기로 돼 간다. 야당은 지난 총선 때 얻은 득표율은커녕 의석수만큼의 민의도 반영 못 하는 허깨비가 돼버렸다. 삼권분립은 이름만 남은 채 속이 비어가고 있다.


'혁명'은 매혹적인 단어다. 이 정부도 '빛의 혁명'을 선언했다. 그러나 혁명의 언어로 제도를 허물고 반대자를 제거하면 남는 것은 자유가 아니라 폐허였다. 프랑스혁명의 총아 로베스피에르도 자신이 세운 단두대에서 생을 마감했듯, 절제 없는 정의는 반드시 자기 파괴로 귀결된다.


이제 필요한 것은 관용과 절제의 회복이다. 그것이 민주주의 지도자의 덕목이다. 민주주의는 불완전하지만, 이를 무너뜨리는 순간 우리는 더 위험한 체제에서 더욱 고통받게 된다. 국회가 거수기가 되고, 사법부가 짓눌리는 사이비 민주주의가 아니라 삼권이 신뢰 속에 서로 존중되는 자유민주주의로 하루빨리 돌아가야 한다.


성탄절과 연말을 앞두고 창세기의 한 구절을 연상한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새날이 밝았더라." 왜 저녁이 먼저 오는지를 묵상해본다.


지금은 민주주의의 어두운 저녁이다. 민주주의의 밝은 아침이 오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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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오 전 국회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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