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원들이 행복한 일터에서 일해야"
이천공장 내 문화공간 21년만에 새단장
경기 이천에 위치한 샘표 간장 생산공장. 개관을 앞둔 미술관 '샘표 스페이스'에서 막바지 정리가 한창이던 이달 초 10년 넘게 이곳을 지켜온 한 직원이 유리 조형물을 닦던 중 '딱' 하는 소리와 함께 작품 일부를 깨뜨렸다. 문제의 작품은 현대미술 작가 Jun.GK의 설치작품이었다. 유리로 만든 'LOVE'의 마지막 글자 'E'가 산산이 조각났다. 박진선 샘표 대표는 직원을 나무라지 않았다.
박 대표는 "사람의 실수보다 중요한 건 함께 지켜온 공간의 의미"라며 회사 명의로 작가에게 작품에 대해 사례했다. 작가는 작품값의 일부만 받았고, 깨진 자리에 '6년간 사귀다 헤어졌다'는 문구를 적은 각서를 붙였다. 작가와 기업, 직원이 함께 만든 이 에피소드는 '예술이 숨 쉬는 일터'라는 박 대표의 철학을 상징적으로 보여줬다.
샘표는 경기 이천공장 내 문화예술공간 '샘표스페이스'를 21년 만에 새롭게 단장하고 재개관했다고 14일 밝혔다. '공장 속 예술 공간'이라는 실험적 개념 아래 직원과 방문객 모두가 일상 속에서 예술을 자연스럽게 마주할 수 있는 공간으로 다시 태어났다.
박 대표의 '예술 실험'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그의 문화적 관심은 25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99년 서울 도봉구 창동의 옛 샘표 공장에서 만 30세 미만의 신진 작가 200여명이 참여한 대규모 예술 축제를 열었다. 산업시설을 문화공간으로 바꾸는 시도는 당시 국내 미술계에도 신선한 충격이었다. 박 대표는 당시 "회색빛 콘크리트 건물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마음은 자연히 경직될 수밖에 없다"며 "공장을 하나의 거대한 공공미술 작품으로 만들어 직원들이 행복한 일터에서 일할 수 있도록 하자는 취지였다"고 말했다.
박 대표는 이후 공장을 경기 이천으로 옮긴 2004년 "행복한 사람이 건강하고 좋은 제품을 만든다"는 신념 아래 공장에 문화 갤러리 '샘표스페이스'를 조성했다. 당시 제조업 공장 안에 미술관을 만든다는 발상은 이례적이었다. 그 선택은 단순한 공간 실험이 아니라, 기업 문화를 바꾸려는 의도였다.
이곳은 단순한 전시장이 아니다. 예술을 통해 '일터의 문화를 바꾸는 실험실'로 기능해왔다. 매년 7회 이상 다양한 주제와 기법의 전시가 이어졌고 직원에게는 '가장 가까운 예술 공간', 고객에게는 '이색적인 문화 체험장', 작가에게는 '대안적 전시 무대'로 자리 잡았다.
샘표 관계자는 "예전에는 예술이 낯설다고 하던 직원들도 20년 동안 자연스럽게 작품을 접하며 태도가 달라졌다"며 "최근에는 직접 작품 구매를 문의하는 직원도 있다"고 설명했다.
리뉴얼 오픈전은 유리를 매개로 공간과 존재의 관계를 탐구하는 Jun.GK 작가의 개인전 '공간을 점유하는 것들 Ⅲ'로 막을 올렸다. 작가는 "불안은 자유를 자각하게 하는 징표이자, 삶을 창조하는 문턱"이라며 실존주의 철학을 예술로 풀어냈다. 대표작은 유리와 스테인리스로 인간 존재의 불안과 자유를 형상화했다.
박진선 대표가 강조하는 것은 작품 그 자체보다 그 과정이다. 예술은 완성된 결과물이 아닌 함께 만들어가는 시간인 것처럼 공장도 사람과 공간이 어우러질 때 비로소 가치가 생긴다는 것이다.
샘표의 문화예술 실험은 공장 밖으로도 확장됐다. 회사는 예술가와 협업해 공장과 연구소를 '행복한 일터이자 지역사회 문화공간'으로 탈바꿈시키고 있다. 이천 간장공장은 '샘표 아트팩토리 프로젝트'를 통해 외벽 전체가 현대미술 작가들의 작품으로 꾸며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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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성 발효 전문 연구소인 '샘표우리발효연구중심'은 '미술관 같은 연구소'로 불린다. 회의실과 복도에는 작가의 스토리텔링 작품이 걸려 있다. 연구원들이 예술적 자극을 받으며 창의력을 발휘하도록 했다. 이런 시도를 통해 샘표는 '메세나 대상' 창의상과 '대한민국 디자인 대상' 디자인경영 부문 국무총리 표창(최우수상)을 수상했다.
임혜선 기자 lhsro@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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