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철회에 맞선 기업의 저항
포춘500 백인 남성 이사 비율 첫 과반 붕괴
흑인여성·아시아계 이사 급증…美기업 새 판짜기
![[THE VIEW]DEI 철폐 논쟁, '기회의 정의'를 묻다](https://cphoto.asiae.co.kr/listimglink/1/2025051211242553003_1747016666.jpg)
"다양성, 형평성, 포용성 (DEI)"은 오늘날 미국 사회를 이해하는 데 핵심적인 개념이다. 다양성은 인종, 성별, 출신, 성적 지향 등 다양한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동등하게 사회에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이념을 뜻한다.
미국은 다인종 국가임에도 불구하고, 사회 구조는 여전히 백인 남성을 중심으로 이뤄져 있다. 그에 따라 흑인, 아시아계, 히스패닉, 여성 등은 역사적으로 차별을 받아왔다. 이러한 불평등을 시정하고자 DEI 정책과 소수자 우대 정책 (affirmative action) 등이 제도적으로 마련돼 왔다.
특히, 2020년 백인 경찰에 의해 흑인 남성 조지 플로이드가 살해된 사건을 계기로, 미국 내 주요 기업들은 앞다투어 인종 정의를 지지하는 성명을 냈다. 또한 기업 내부의 다양성과 포용성을 확대하겠다고 약속했다. 마이크로소프트, IBM, 존슨앤존슨 등 글로벌 기업들은 소수자 채용 확대, 공급망 다양화, 인권단체 후원 강화 등 구체적 행동 계획과 함께 수치화된 목표치까지 제시했다. 월스트리트 금융기관들도 소수계 기업 대출 확대와 다양성 펀드 조성 계획을 발표했다.
같은 해, 캘리포니아주는 더 급진적인 제도를 도입한다. 일정 규모 이상의 상장기업 이사회에 반드시 소수 인종 또는 성 소수자 출신 인사를 포함시키도록 의무화하는 법을 통과시킨 것이다. 이는 미국 최초로 이사회 다양성을 법제화한 사례였다. 비록 이 법은 2022년 법원 판결로 무효화됐지만, 미국 기업 문화에 다양성이 진지한 과제로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례였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반발도 커졌다. 2023년, 미국 대법원은 대학 입학에서 소수자 우대 정책을 위헌으로 판결했다. 이어 2025년 트럼프 대통령은 연방 정부 전반의 DEI 프로그램을 폐지하고, 민간 기업의 DEI 정책에 대해서도 조사를 지시했다. 이에 메타 (구 페이스북), 구글 등 주요 IT 기업들조차 DEI 활동을 철회하거나 축소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놀랍게도 이러한 정치적 역풍에도 불구하고, 미국 대기업 이사회는 여전히 점진적으로 다양해지고 있다. 포춘 500대 기업 상위 50개사 이사회를 분석한 결과, 2024년 말 기준 백인 남성 이사 비율은 48.4%로 사상 처음 절반 이하로 감소했다. 흑인 여성, 아시아계, 히스패닉계 출신 이사들의 수는 꾸준히 증가하는 추세이며, CEO 또한 점차 다양한 배경을 가진 인사들로 바뀌고 있다. 글로벌 기업들의 경우 이미 상당수 CEO와 이사진이 미국 이외 국적자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는 글로벌 시장에서 경쟁하기 위한 필수 전략으로 자리잡고 있다.
하지만 DEI에 대한 정치권의 공세와 여론 악화로 이러한 변화의 지속가능성은 불투명하다. 다양성 관련 전문가들은 정치적 환경 변화에 따라 기업들의 DEI 정책이 축소될 가능성을 우려하고 있다. 일부 기업들은 이미 다양성 관련 직책을 축소하거나 폐지했으며, 채용 과정에서의 다양성 고려를 제한하는 움직임이 관찰되고 있다
한국에서는 '다양성'이라는 개념이 아직 생소하게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미국 사회에서 다양성은 단순히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나 도덕적 가치를 넘어, 경제적 이득과 경쟁력을 높이는 전략적 가치로 인식된다. 다양한 배경에서 온 사람들은 다양한 관점을 제시하고, 이로 인해 다양한 고객층의 요구를 이해하거나 기술 혁신을 촉진하는 데 강점을 가진다.
실제로 연구 결과 다양성이 높은 조직일수록 수익성, 창의성, 그리고 직원 만족도가 높다. 그렇기에 DEI는 "정치적 올바름 (political correctness)"을 넘어 미국 기업 경쟁력의 핵심 요소로 자리 잡아왔다. 다양성을 지향하는 조직문화는 단기적 이익이나 이미지 관리가 아니라, 장기적인 생존 전략인 셈이다.
트럼프 행정부의 DEI 폐지와 소수자 우대 정책 철회는 단순한 정책 변화가 아니다. 이는 미국 사회 내부의 뿌리 깊은 균열, 즉 누구에게 기회가 주어져야 하는가, 누구를 진짜 미국인으로 인정할 것인가에 대한 논쟁을 다시 촉발시킨 사건이다. 그리고 이 갈등은 향후 미국 경제와 사회 전반에 걸쳐 깊은 영향을 미칠 것으로 예상된다.
다양성은 갈등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이들의 존재를 인정하고 그 차이 속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찾으려는 시도다. 미국은 지금 이 원칙?기회의 분배와 국가 정체성?을 지킬 것인가 아니면 포기할 것인가의 기로에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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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보영 美 인디애나주립대 교수
김희윤 기자 film4h@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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