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그 자체로 책 전체 내용을 함축하는 문장이 있는가 하면, 단숨에 독자의 마음에 가닿아 책과의 접점을 만드는 문장이 있습니다. 책에서 그런 유의미한 문장을 발췌해 소개합니다.
프리랜서 과학 저널리스트인 저자는 사람 얼굴을 잘 기억하지 못한다. 중학교 친구를 고등학교 내내 알아보지 못했고, 때때로 이모를 엄마로 착각하기도 했다. 심지어 슈퍼마켓에서 낯선 남자를 남편으로 착각하기도 했다. 알고 보니 저자는 안면인식장애뿐 아니라 사물을 3차원으로 보지 못하는 입체맹, 심상을 떠올리지 못하는 아판타시아, 일화기억이 없는 자전적 기억 결핍을 가지고 있었던 것. 이 책은 저자의 경험을 담은 실험 논픽션이다. 저자가 겪은 엉뚱한 사건을 통해 뇌가 세상을 받아들이는 방식을 과학적으로 탐구한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흰색과 금색으로 보이고 또 어떤 사람들에게는 검은색과 파란색으로 보이는 것으로 입소문이 났던 드레스 사진을 기억하는가? 우리는 모두 같은 이미지를 보고 있지만 완전히 다른 것들을 보고 있다. 이런 현상은 우연히 일어난 게 아닐뿐더러 심지어 늘 일어난다. 세상은 모호한 정보로 가득 차 있고, 뇌가 다르다 보니 판단도 다를 수밖에 없다. 「서문」 에서
자폐증을 겪는 사람들 중 약 36퍼센트가 얼굴인식불능증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연구자들은 자폐증을 겪는 사람들은 안면인식장애 연구에서 제외하는 경우가 많다. 그 이유는 자폐증과 관련된 안면인식장애가 다른 형태의 안면인식장애와 발달 경로가 다를 수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이런 가정이 옳은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논란이 있다). 「얼굴은 이상하다, 모두 다르다는 점에서」에서
신경다양성 운동가들은 자폐증이나 ADHD가 약점뿐 아니라 강점도 동반하는 차이로 받아들여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 비전형적인 뇌를 가진 사람들에 대한 더 많은 이해와 배려를 요구하고 있다. 이는 모든 사람에게 이익이 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인류가 존재론적 위기에 직면한 이 시점에 우리에겐 모든 두뇌의 힘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얼굴인식의 키, 방추상얼굴영역」 에서
이는 얼굴을 인식하는 능력을 발달시키기 위해서는 왼쪽 눈을 통한 초기 얼굴 노출이 매우 중요함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오른쪽 눈은 어떨까? 별로 중요하지 않다. 이런 연구 결과는 꽤 일리가 있다. 영아의 경우 왼쪽 눈은 주로 뇌의 오른쪽 반구와 연결되기 때문이다. 만약 왼쪽 눈의 시력이 약하다면, 얼굴인식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오른쪽 방추상얼굴영역이 발달하는 데 필요한 시각 정보를 받지 못하게 된다. 「입체를 볼 수 없는 운전자, 도로로 나가다」 에서
이런 결과는 발달의 결정적 시기라는 개념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결정적 시기란 신경가소성(neuroplasticity)이 일어나는 짧은 기간을 말하며, 이 시기가 지나면 뉴런의 배열이 고정된다. 입체시의 경우 이 시기가 매우 짧다. 영아는 약 3개월 반쯤부터 3차원으로 사물을 보기 시작하지만, 많은 어린이와 일부 성인은 그보다 훨씬 늦은 시점에 입체시를 얻기도 한다. 예컨대, 수전 배리는 마흔여덟 살에 처음으로 3차원 시각을 얻었다. 이는 대부분 사람이 불가능하다고 여겼던 일이다. 「입체맹의 세계」 에서
초등학교 시절에는 아판타시아가 커다란 단점이었지만, 큰 그림을 보고 사고하는 능력은 과학자이자 관리자로서 자신을 차별화하는 데 도움이 됐다고 벤터는 말한다.
“제 두뇌의 작동 방식은 제가 지닌 어떤 특성보다 제 성공에 크게 기여했을 겁니다. 단순히 그림을 보지 못하는 게 아닙니다. 세상을 바라보는 전체적인 방식 자체가 보통 사람들과 다른 거죠.” 「시각적 기억을 배울 수 있을까」 에서
세상에 드러나지 않은 신경다양성을 모두 이해하지 못한 탓에 내 가장 친한 친구들을 오해한 적도 있다. 미리엄은 자기가 원해서 과거에 집착하는 게 아니다. 나는 상상할 수 없는 방식이지만, 미리엄의 과거는 생각보다 현재에 가깝다. 시빌은 오븐을 켜놓고 나온 건 아닌지 걱정하면서 나를 짜증 나게 하곤 했는데, 집이 완전히 타서 잿더미가 되는 장면을 머릿속에서 생생히 상상한다는 사실을 알고 나니 이제는 그 염려를 더 공감할 수 있게 됐다. 스티브는 설거지하는 일을 ‘잊기로’ 한 게 아니다. 진심으로 그냥 잊어버린 거다. 「박쥐가 된다는 건 어떤 느낌인가」 에서
사실 나는 기자를 직업으로 삼기 훨씬 전부터 내 삶을 강박적으로 기록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다가 괴짜 중년의 위기로부터 마지막, 어쩌면 가장 큰 깨달음을 얻었다. 나는 얼굴인식불능증, 입체맹, 아판타시아, SDAM을 ‘지닌’ 게 아니다. 이것들은 나 ‘자신’이다. 이것들은 나라는 조개 속에 들어와 이리저리 괴롭히면서 ‘세이디스러움’이라는 진주를 만들게 한 모래알들이다. 안면인식장애는 내게 강한 친화력과 알 수 없는 대상을 두려워하지 않는 굳센 마음을 선물했다. 입체맹은 영원한 외부인으로서의 관점을 줬다. SDAM과 아판타시아는 내가 이야기꾼이자 작가가 되도록 이끌었고, 잊을 수도 있었을 중요한 순간들을 글로 남기도록 도왔다. 「다르게 보는 나도 나다」 에서
얼굴을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들의 뇌 | 세이디 딩펠더 지음 | 이정미·이은정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388쪽 | 1만9800원
서믿음 기자 faith@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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