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자연합 완승…형제측 제안 모두 부결
소액주주 표심 4자연합으로 돌아서
분쟁 지속되면 '모두가 패배'
한미약품그룹의 경영권 분쟁이 새로운 국면을 맞고 있다. 지난 19일 열린 한미약품 임시주주총회에서 형제 측이 제안한 이사 해임 안건이 부결되면서, 창업주의 미망인 송영숙 회장과 딸 임주현 부회장, 신동국 한양정밀 회장, 라데팡스파트너스로 구성된 '4자 연합' 측이 우위를 점하게 됐다. 이로써 지난 3월 한미사이언스 정기주총 이후 형성된 경영 구도에 새로운 변화가 예고되고 있다.
이번 임시주총은 한미약품그룹 지주사인 한미사이언스의 이사회가 '5대5' 교착 상태에 빠진 이후, 임종윤·임종훈 형제 측이 사업회사인 한미약품의 경영권 장악을 시도하면서 소집됐다. 형제 측은 박재현 대표이사를 포함한 현 경영진 2명의 해임을 시도했으나, 국민연금과 글로벌 의결권 자문사들의 반대에 부딪혔다. 특히 이번 주총에서는 특별결의 요건인 의결권 있는 주식 3분의 2 이상의 찬성을 얻지 못하면서, 형제 측의 경영권 확보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업계에서는 이번 표결 결과의 가장 큰 변수로 소액주주들의 표심 변화를 지목하고 있다. 지난 3월 한미사이언스 정기주총에서는 형제 측을 전폭적으로 지지했던 소액주주들이 9개월 만에 극적인 입장 변화를 보인 것이다. 전체 소액주주의 39% 중 28%가 형제 측의 제안을 반대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한미약품 전체 의결권 주식의 3분의 1에 가까운 규모로, 이번 표결의 향방을 결정짓는 핵심 요인이 됐다.
제약업계 관계자들은 "주가 상승 등 가시적인 성과가 없었던 것이 소액주주들의 마음을 돌린 주요 원인"이라고 분석했다. 형제 측이 3월 경영권 장악 이후 제시한 신약 개발과 투자 유치 등의 청사진이 실현되지 않으면서 신뢰를 잃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개인 최대주주인 신동국 회장도 형제 측의 계획이 실현 가능성이 낮다고 판단, 일찌감치 모녀 측으로 돌아선 것으로 알려졌다.
한미약품그룹 내부의 갈등 구조도 경영 성과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한미사이언스가 한미약품에 제공하던 재무, 홍보, 법무, 인사 등 경영 지원 업무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으면서 그룹 전체의 경영이 어려움을 겪고 있다. 특히 지주회사와 사업회사 간의 협력이 원활하지 않아 신규 사업 추진이나 투자 의사결정이 지연되는 등 실질적인 경영 차질이 발생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됐다.
임시주총 직전 형제 측의 임종윤 이사가 안건 철회를 제안하고, 주총 이후 임종훈 한미사이언스 대표이사가 결과를 존중하겠다는 입장을 밝혔지만, 업계에서는 갈등이 쉽게 해소되지 않을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특히 내년 3월 한미사이언스 정기주총을 앞두고 양측의 표심 잡기 경쟁은 더욱 치열해질 것으로 예상된다.
모녀 측, 특히 송영숙 회장은 두 아들의 '선을 넘는 공격'에 대해 강경한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이미 고소·고발전으로 번진 상황에서 법적 책임을 묻겠다는 의지를 보이고 있어 가족 간 화해가 쉽지 않은 상황이다. 업계 관계자는 "감정의 골이 깊어진 상황에서 단기간 내 타협점을 찾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전망했다.
현재 한미사이언스 이사회는 5대5 동수로 구성돼 있어 중요한 의사결정이 이뤄지기 어려운 상황이다. 업계에서는 이를 '휴전선이 그어진 상태'에 비유하며, 내년 3월 정기주총까지는 그룹 차원의 중요한 의사결정이 지연될 수 있다고 우려하고 있다. 이는 신약 개발이나 해외 진출 등 장기적인 성장 전략 수립에도 걸림돌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
한미약품의 올해 실적은 국내 제약업계 전반의 호조세에도 불구하고 상대적으로 저조한 성과를 보였다. 매출액과 영업이익이 성장세를 보였으나, 국내 제약업계 상위권 평균에는 미치지 못했다. 경영권 분쟁으로 인한 경영 공백과 의사결정 지연이 실적 부진의 주요 원인으로 지목되고 있다.
특히 주목할 만한 점은 한미약품이 그룹 전체 매출의 90% 이상을 차지하는 핵심 계열사라는 점이다. 현재 한미약품의 경영진은 선대 회장 시절부터 이어온 전문 경영인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들은 대체로 모녀 측을 지지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형제 측이 이번 임시주총에서 현 경영진 교체를 시도한 것도 이러한 배경에서 비롯된 것으로 분석된다.
업계 전문가들은 "정치권의 선거처럼 승패가 갈린 뒤에는 어느 정도 타협점을 찾아야 한다"며 "회사와 주주들의 이익을 위해서라도 장기적인 소모전은 피해야 할 것"이라고 조언했다. 특히 "양측 모두 회사의 존립 자체를 위협할 수 있는 극단적인 대립은 피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오고 있다.
당분간 경영권 분쟁이 지속될 것으로 예상되는 가운데, 한미약품의 기업 가치 보존을 위한 양측의 합의점 도출이 시급한 상황이다. 업계에서는 내년 3월 정기주총까지 양측이 극단적인 대립을 자제하고, 최소한의 경영 협력 체제를 유지할 필요가 있다는 의견이 제기되고 있다. 이는 한미약품의 주주가치 보호와 경쟁력 유지를 위한 필수적인 과제로 인식되고 있다.
이동혁 기자 dong@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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