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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보면]장태완은 오래전부터 전두환과 껄끄러운 사이였다(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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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2 군사반란 조명한 김성수 감독 '서울의 봄'
장태완 6·25 임관 장교 중 가장 먼저 육군 소장 진급
전두환 12·12 앞두고 장태완 사무실에 김장비 건네
"정승화, 순순히 따라줬으면 장관 이상으로 모시려 해"

김성수 감독이 연출한 영화 '서울의 봄'은 1979년 발생한 12·12 군사반란을 다룬다. 정권을 탈취하려는 신군부 세력 전두광(황정민) 보안사령관과 그에 맞서 서울을 지키려는 이태신(정우성) 수도경비사령관의 긴박한 아홉 시간을 그린다. 첨예하게 대립한 배경에는 10·26 사태가 있었다. 권력 공백의 과도기적 상황을 누가 관리하고 주도하느냐가 화두로 떠올랐다.


[알고보면]장태완은 오래전부터 전두환과 껄끄러운 사이였다(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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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적으로는 군부의 태도가 가장 중요했다. 강력한 물리력을 가진 그들의 태도에 따라 민주화의 향배가 좌우될 수 있었다. 그런 점에서 민주화의 성공에는 군부의 정치적 불개입과 중립적 태도가 절대적으로 요구됐다. 정승화 계엄사령관은 민간정부 지지의 태도를 보였으나 지속할 수 없었다. 12월 12일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비롯한 군내 강경파가 하극상의 군사 반란을 일으켜 정 계엄사령관을 체포하고 군을 장악하기에 이른 까닭이다.


10·26 사태가 발생한 지 두 달도 채 되지 않아 군사 반란이 성공한 주요 요인은 하나회로 다져진 끈끈한 인맥이었다. 전 장교의 0.05%에 불과했으나 주요 기관 곳곳을 점령하다시피 했다. 반대편 핵심 인사들마저 우왕좌왕과 우유부단으로 일관해 사실상 무혈입성했다. 그렇게 국헌 문란을 막지 못한 사이 군의 정통성과 통수 체계, 기강은 완전히 짓밟혔다. 병력을 소집해 출동을 준비했던 장태완 수도경비사령관은 훗날 12·12 군사반란의 진상을 공개하며 다음과 같은 바람을 적었다. 어쩌면 '서울의 봄'이 제작된 이유일 수 있다.


"이 땅에 진정한 개혁을 이룩하기 위해서라도 12·12 군사반란 주동자들에 대한 사법처리는 시대적 소명이고 국가적 과제이다. 올바른 역사적 심판은 사건의 정확한 진상규명 없이는 그 평가가 불가능하다는 전제 아래 이들 주동자들에 대한 엄정한 사법처리로 실체적 진실을 밝혀내고 그들의 죄상을 남김없이 도려내어 다시는 우리 민족사에 일대 오점으로 점철된 12·12 군사반란과 같은 비극적 사태가 발생하지 못하도록 철퇴를 가하는 길만이 올바른 역사적 심판을 시작하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알고보면]장태완은 오래전부터 전두환과 껄끄러운 사이였다(上)

'알고 보면' 좋을 정보를 두서없이 전달한다. 영화를 흥미롭게 관람하는 팁이다.


*장태완은 6·25전쟁 기간 임관된 장교 3만여 명 가운데 육군 소장으로 가장 먼저 진급했다. 그는 훗날 "내가 만일 선두주자가 되지 않았더라면 수도경비 사령관에 보직되지도 못했을 것이며 만고의 불충자가 되는 기적도 돌아오지 않았을 것"이라고 회고했다.


*장태완은 제26사단장 임기를 마치고 육군본부 교육참모부 차장으로 근무하던 1979년 10월 27일 오전 3시경 잠자리에서 육본 교육참모부 주번사관으로부터 2급 비상사태 발령을 전달받았다. 2급 비상사태는 언제라도 명령만 있으면 즉각 전투 태세로 들어가는 비상조치다.


*육군본부에 도착한 장태완은 정승화 참모총장이 어떻게 남들보다 먼저 청와대의 변고를 알고 2급 비상사태를 발령토록 지시했는지 궁금해했다. 전날 김재규 정보부장은 정 총장에게 전화를 걸어 식사나 같이하면서 조용히 시국을 이야기하자고 했다. 저의를 전혀 모르는 정 총장은 아무런 뜻 없이 응했다. 정 총장은 정보부장 사무실 응접실로 안내받았다. 그런데 나타나야 할 초대자는 보이지 않았다. 그는 김 부장이 약 50m 떨어진 곳에서 대통령, 비서실장, 경호실장 등과 술을 마시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기분이 상했으나 식사하며 계속 기다렸다. 식사 도중 나타난 김 부장은 "조금만 기다려 주쇼. 갑자기 각하께서 만찬에 참석하라고 해서 조금 늦어질 것 같소"라는 말을 남기고 다시 나가버렸다. 그리고 식사가 거의 끝나갈 무렵 난데없는 연발 총성이 울렸다. 얼마 뒤 정 총장은 차 뒷좌석에서 김 부장으로부터 박정희 대통령의 사망 소식을 전달받았다. 당시 차는 3·1 고가도로로 올라서고 있었다. 정 총장이 어디로 가느냐고 묻자 김 부장은 남산(중앙정보부)으로 간다고 했다. 정 총장은 육군본부로 가자고 했다. 대통령이 저격당했다면 범인은 반드시 경호원일 것으로 생각했다. 만일 범인이 차지철 경호실장이거나 끄나풀이라면, 차 실장이 군 지휘관들에게까지 줄이 닿아 있었기 때문에 만일의 사태를 고려해 전군을 지휘할 수 있는 통신망이 완벽하게 갖추어져 있는 육군본부로 가는 게 좋을 것 같다고 판단했다. 그렇게 차는 육군본부로 달렸다.


*정승화 참모총장은 2급 비상 태세를 지시했을 당시에도 대통령을 시해한 범인이 누구인지 알지 못했다. 그는 국무회의에서 만장일치로 계엄사령관에 임명됐다.


*정승화 참모총장은 계엄사령관이란 중책을 맡은 김에 군인의 정치참여를 막고 군의 정치적 중립을 실현하려고 노력했다. 장태완은 "교육참모부 차장으로 총장 가까이 있으면서 확인할 수 있었던 일"이라며 "'군의 정치적 불 간여 공약'도 이를 입증한다"고 말했다. 정 총장은 정치적 야망이 전혀 없는 군인이었다. 국내의 치안과 질서를 순리에 따라 계엄법 테두리 내에서 유지해갔다. 여론에 따라 최대한 빨리 진정한 민주정권을 수립시키려고 했다.


[알고보면]장태완은 오래전부터 전두환과 껄끄러운 사이였다(上)

*정승화 참모총장은 1979년 10월 28일 교육참모부 차장이던 장태완을 호출했다. 그는 "교육과정에선 우등했고, 경력도 대부분이 전방 야전군 사령부 예하 부대의 지휘관, 그리고 작전참모 등 할 것은 다 했군. 후방근무는 비교적 적은 편인데, 1973년에서 1975년 사이에 수도경비사령부 참모장으로 근무한 적도 있구먼. 장 장군이 수도경비 사령관으로 아주 적격자군"이라고 말했다. 장태완은 마음속으로 기뻤으나 두려움이 앞섰다. 그래서 "저보다 더 적격인 장군들이 많이 있을 것이니 물색을 다시 해주실 것을 건의드립니다. 죄송합니다"라고 밝혔다. 정 총장은 지체하지 않고 단호한 명령조로 말했다. "이 사람아! 인사는 총장이 하는 거야. 자네는 시키는 대로 하면 되는 건데 무슨 사양이 필요해! 자네가 제일 적임자야. 나도 많이 고려한 끝에 결정한 것이니까 그리 알고 있어!" 장태완은 며칠만 시간 여유를 달라고 읍소한 뒤 총장실에서 나왔다.


*장태완과 정승화 참모총장은 가까운 사이가 아니었다. 고향이 각각 인동과 김천으로 달랐으며 제1군에서 함께 일한 시간(3개월)도 매우 짧았다. 한두 번 결재를 주고받으며 10분 정도 접촉한 일이 전부였다. 장태완은 교육참모부 차장으로 일한 1979년 초 육군참모총장으로 부임한 정승화를 다시 만났다. 하지만 이때도 참모부장이 없을 때 참모총장실에서 있는 일반참모회의에 한두 번 부장 대리로 참석한 일 외에 마주한 일이 없었다. 더구나 장태완은 정 총장이 부임한 지 한 달이 채 되지 않았을 때 육·해·공군 장교교육제도 연구위원장으로 국방부에 파견됐다. 그는 약 10개월 뒤 육군본부로 복귀했다. 국방부에서 연구한 '육군의 교육개혁 방안'을 약 시간 동안 정 총장에게 보고했다. 정 총장은 "참으로 좋은 연구를 했군. 내가 참모총장 재직 중에 꼭 한번 실천해 보겠어"라고 칭찬했다.


*장태완은 1979년 11월 16일 수도경비사령부 연병장에서 육군참모총장 겸 계엄사령관인 정승화 대장 주관 아래 전임 수경사령관 전성각 장군과의 사령관 이취임식을 가졌다. 그는 고향 집으로 되돌아온 느낌을 받았다. 1973년 4월 수도경비사령부 참모장으로 부임해 2년 3개월 동안 생활했기 때문이다. 부사관 대부분이 지난날 함께 일한 전우들이라 생소하지 않았다. 그는 취임식 뒤 주요 대령들을 면접했다. 장세동 30경비단장, 김진영 33경비단장, 조홍 헌병단장, 황동환 방공포병단장, 구명희 야포단장 등이다. 30·33경비단은 청와대 근위부대였다. 소위 특정 지역이어서 상급 부대의 지휘검열을 받지 않았다. 군 조직상 지휘계통은 엄연한 수경사 예하 부대이나 청와대 경호실의 작전통제를 받았다. 경호실은 지휘관 선발의 인사권까지 행사했다. 장태완은 맹호사단 제1연대 부연대장으로 있을 때 장세동·김진영 대령과 함께 일한 적이 있었다. 그들은 장태완을 선배로 깍듯이 대했다.


*장세동·김진영 대령과 조홍 대령, 신윤희 중령(헌병 부단장), 김진성 중령(작전처 보좌관) 등은 하나회원이었다.


[알고보면]장태완은 오래전부터 전두환과 껄끄러운 사이였다(上)

*1979년 12월 5일 전두환 보안사령관의 비서실장 허화평 대령이 장태완의 사무실로 찾아왔다. 그는 봉투를 건넸다. 전두환이 만년필로 쓴 메모지와 함께 수표 한 장이 들어있었다. "형님, 얼마 되지 않지만, 집의 김장에 보태쓰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장태완은 의아했다. 수경사 참모장 때 하나회 계열이자 전두환 동서인 김상구 방공포 대대장을 입창시킨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깊은 유감이 있을 그가 김장값으로 보태라고 보낸 저의가 궁금했다. 장태완은 허 대령을 돌려보내고 참모장인 김기택 준장을 방으로 불렀다. 김 준장은 육사 11기로 전두환과 동기 사이였다. 장태완은 "보내준 것을 당장 되돌려 보낸다는 것도 그러니까 참모장이 가까운 시일 내에 상대방이 오해하지 않도록 돌려보낼 방법을 한번 연구해 보쇼"라고 지시했다. 김 준장은 회식이 많은 연말이 다가오고 있으니 회식비에 보태쓰는 것이 좋을 듯하다는 투로 말했다. 장태완은 괜찮은 생각이라며 김 준장에게 수표를 건네줬다.


*장태완은 김상구 중령의 일이 있는 뒤 전두환을 전혀 만나본 일이 없었다. 수경사령관으로 부임한 뒤 보안사령관인 그를 계엄업무 회의에서 처음으로 만났다. 이때 전두환은 수경사령관 취임을 축하한다고 했다. 장태완은 김상구 중령 일을 서운하게 생각하고 있는지 넌지시 마음을 떠보았다. 전두환은 "다 지나간 일입니다. 그 친구가 잘못한 일인데 뭘 그러세요"라고 말했다.


*1979년 12월 8일 조홍 대령은 장태완을 찾아와 이런 말을 했다. "사령관님! 오늘 제가 전두환 보안사령관실에 인사하러 갔더니 보안사령관께서 12월 12일 오후 6시 30분에 사령관님과 특전사령관 정병주 장군님, 그리고 헌병감 김진기(당시 계엄사 치안처장) 장군님을 모시고 단합 만찬을 가지려고 하는데 건의드려 보라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장태완은 "그런데 자네가 왜 그런 연락을 하지? 자네 혹 이번에 진급하려고 장난하는 것 아냐? 자네 혼자 진급하겠다고 경거망동한다면 자넨 장군이 될 자격이 없어. 그리고 지금 내가 자네 술을 얻어먹게 됐나. 처지가?"라고 나무랐다. 조 대령은 그런 게 아니라고 극구 부인했다. 장태완은 보안사령관 비서실장이 찾아와서 그런 말을 하고 간 일도 있어서 언젠가 한 번 가져야 할 일이라 생각하고 "그럼 좋아!"라고 말했다.


*장태완은 훗날 일련의 일들을 돌아보며 다음과 같이 추측했다. "12·12 군사 쿠데타 계획은 12월 5일 훨씬 이전서부터 꾸며지고 있었으며, 그 계획이 확정되고 거사 일을 12월 12일로 정한 것은 조홍 대령이 12월 8일 전 장군이 정한 파티 일시를 전해 준 것으로 볼 때 그들은 12월 5일 이전에 이미 모든 거사 준비를 완전히 끝내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2·12 사태를 촉발하게 된 원인은 정승화 계엄사령관이 전두환 보안사령관 겸 합동수사본부장을 축출하려고 하는 움직임 때문이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내가 판단해 보기에 일부 인사들이 말하고 있는 계획적인 쿠데타가 아니라 우발적인 군부의 하극상 사건이었다고 하지만 이것은 확실한 계획적 쿠데타이다. 내가 그렇게 주장할 수 있는 것은 정승화 장군은 자신이 노재현 국방부 장관과 둘이서 골프를 치며 보안사령관 교체 문제를 논의한 일이 있으나, 그날은 일요일인 12월 9일이었다고 밝혔다. 그리고 이날 정 총장이 노 장관에게 김재규 재판이 끝나면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교체시키는 문제를 건의했는데 노 장관은 좀 더 달래가면서 써보다가 정 안 되면 그때 가서 교체하자고 말했다는 것이다. 일설에 따르면 노 장관이 둘이서 말한 이 사실을 김용휴 국방부 차관에게 말하고 의견을 묻자 김 차관도 이에 동의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김 차관은 약 2시간 뒤에 보안사령부까지 가서 전두환 사령관에게 귀띔해 줌으로써 12·12 사태를 촉발한 직접적인 도화선이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일은 이미 나에게 연희동 파티 일시를 전달해 준 다음 날에 있은 일이다. 이런 점으로 봐도 보안사령관 축출 움직임이 12·12 사태를 촉발한 직접적인 원인도 아니며 우발적으로 발생한 쿠데타도 아님을 확실하게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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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승화 장군은 12·12 사태가 계획적이었다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박 대통령이 시해당한 10·26 사태가 발생하자 가장 불안해한 사람은 당시 청와대나 중앙정보부 같은 특수기관에 파견돼 있던 사람들(대두분이 하나회원)이었다. 10·26 사건이 발생하자 군에서 성장하기 어렵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더구나 군 내부에서도 그들을 군에서 내쫓아야 한다는 여론이 많이 일고 있었다. 계엄사령관인 내가 직접 각 군 사령부를 순회하면서 훈시를 통해 무마시켜야 했을 정도였다." 훈시 내용이 보안계통을 통해서 전두환의 귀에 들어갔을 것은 당연했다.


*10·26 사건 뒤 전두환과 그 지원 세력인 하나회 멤버들을 요직에 안배하기 위한 군부 개편을 구상하고 있었으나 이것이 묵살되자 12·12를 구상했다는 설도 있다. 장태완은 사실이라고 확신했다. "내가 수경사령관으로 나가기 전에 육사 11·12기를 비롯한 정규 육사 출신 장교들이 자주 모임을 열고 뭔가 계획하고 있는 듯하니 이들의 동향을 면밀하게 관찰할 것을 당부하는 미 제8군의 통보가 왔다는 말을 들은 일이 있었다. 이것은 나중에 확실하게 밝혀진 사실이지만, 전두환과 그 지원 세력들은 10·26 뒤 군의 헤게모니를 장악하고 자신들의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군부 개편뿐만 아니라 국무총리, 국방부 장관 등 일부 국무위원을 임명하는 문제까지 구상하고 있었다. 즉 전두환과 몇몇 지원 세력들은 국방부 장관 노재현을 국무총리, 참모총장 정승화를 합참의장 아니면 국방부 장관, 제1군단장 황영시를 참모총장, 보안사령관 전두환을 참모차장, 제9사단장 노태우를 보안사령관, 제50사단장 정호용을 특전사령관, 그리고 유학성, 차규헌, 윤성민 중장 등은 군사령관으로 임명하는 복안까지 갖고 있었던 점으로 볼 때 그들은 이미 집권을 구상하고 있던 것이다."


*장태완은 12·12 뒤 서빙고로 연행돼 조사받은 뒤 전두환을 만난 일이 있었다. 이때 전두환은 이런 말을 했다. "정승화 총장이 우리 뜻대로 순순히 따라줬으면 장관 또는 그 이상으로 모시려 했고, 장 선배님은 군단장으로 나가게 할 생각이었다."


*1979년 12월 12일은 12·12 사태가 발생한 날이기도 하지만, 장군 진급자 발표가 있는 날이기도 했다. 장태완은 오전에 정승화 참모총장으로부터 작전참모인 박동원 대령이 진급에서 빠졌다는 이야기를 전달받았다. 박 대령은 심사위원회에서 올린 진급 정원의 두 배수에 해당하는 후보자 명단에조차 포함되지 않았다. 장태완은 한 달여 전 전두환이 한 말을 떠올렸다. "형님! 박동원 작전참모를 진급시키면 큰일 납니다. 박 대령은 전임 사령관인 전성각 장군이 월남에서 함께 근무한 적이 있다고 해서 데려다가 작전참모를 시킨 건데, 그놈은 대위 때부터 김대중을 지지한 자예요. 그러니 진급시키면 안 됩니다." 장태완은 며칠 뒤 수도군단장인 차규헌 장군에게도 비슷한 말을 들었다. 당시 김대중 지지자는 군내에서 '사상 불온자'로 통했다. 박 대령은 김대중 문제에 대해 일언반구도 한 적이 없었다. 다만 대위 시절 육군대학 정규과정을 교육받으며 하나회를 공개 비판한 일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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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태완은 12월 12일 오후 6시경 전속부관 천연우의 안내에 따라 전두환의 만찬 초대가 예정된 연희동으로 이동했다. 요정은 고급주택이었다. 넓은 잔디 정원에 갖가지 화초로 장식한 2층 석조건물이었다. 먼저 와있던 특전사령관 정병주 장군과 육군 헌병감 김진기 장군은 보안사령부 참모장 우국일 준장과 함께 정원에 앉아서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방 안으로 들어가니 수경사 헌병단장인 조홍 대령도 와있었다. 장태완은 동료 장성들과 함께하는 자리에 사전 허락도 없이 동석하려는 행위가 못마땅했다. 지나칠 정도로 면박을 줬다. 그가 이곳에 와 있었던 건 장태완과 특전사령관 등을 거사 완료 예정 시간인 8시 30분까지 술자리에 잡고 있으려는 공작이었다.


*술자리 도중 전화를 받으러 밖으로 나갔던 김진기 장군은 심각한 표정을 하고 장태완을 불렀다. 그는 총장공관에서 총격 소리가 들렸다는 소식을 전했다. 장태완은 바로 총장공관에 전화를 걸었다. 상대방은 제대로 응대로 못하고 "앰뷸런스"라고 소리쳤다. 전화는 곧 끊어졌고, 이내 차에서 대기하고 있던 부관이 뛰어 들어와 같은 소식을 들려줬다. 7시 20분경, 주연을 시작한 지 10여 분이 지난 때였다. 장태완은 수경사령관으로 차를 전속력으로 몰게 했다.


*장태완은 옆자리에 앉아있는 헌병단장 조홍 대령에게 "총장공관의 사태를 어떻게 생각하나?"라고 물었다. 조 대령은 대답을 약간 머뭇거리다가 "글쎄요. 대통령 시해 사건 이후 사회가 어수선해진 틈을 타고 침투한 무장 간첩의 소행일 가능성도 있지 않습니까?"라고 말했다. 장태완은 엉뚱한 말이라고 생각했다. 다급해진 마음에 달리고 있는 차 속에서 작전을 지시했다. "우선 에이피시(경장갑차) 한 대와 헌병특공대 한 소대를 총장공관으로 보내서 현지 상황을 파악하고 긴급사태에 대처하도록 한다. 그리고 전 예하 부대에 비상을 발령하고 모든 지휘관과 참모들을 상황실에다 집합시켜라!" 이때가 오후 7시 40분경이었다.


[알고보면]장태완은 오래전부터 전두환과 껄끄러운 사이였다(上)

*12·12 쿠데타 주역들은 이날 오후 6시 30분경부터 30경비단장실에 모여들었다. 국방부 군수차관보 유학성 중장, 수도군단장 차규헌 중장, 제1군단장 황영시 중장, 제9사단장 노태우 소장, 제20사단장 박준병 소장, 제1공수여단장 박희도 준장, 제3공수여단장 최세창 준장, 제5공수여단장 장기오 준장, 제71방위사단장 백운택 준장 등이었다. 대령급으로는 30경비단장 장세동 대령, 33경비단장 김진영 대령 등이 있었다. 장태완과 정병주, 김진기 장군 등이 연희동 요정에 모이고 있을 때였다.


*전두환은 정승화 총장을 연행하기 위해 허삼수, 우경윤 대령을 총장공관으로 보냈다. 전두환은 대통령 재가를 얻으려고 합동수사본부 수사국장 이학봉 중령을 대동하고 총리공관으로 최규하 대통령을 찾아갔다. 이때가 오후 6시 30분으로 알려져 있다.



참고 자료 : 장태완 지음·발행처 명성출판사 '12·12 쿠데타와 나(1993)', 한국일보 정치부 지음·발행처 한국일보사 '빼앗긴 서울의 봄(1994)', 고나무 지음·발행처 북콤마 '아직 살아있는 자 전두환(2013)', 노태우 지음·발행처 조선뉴스프레스 '노태우 회고록(상): 국가 민주화 나의 운명(2011)', 정일영·황동하 지음·발행처 그림씨 '전두환 타서전(2017)', 정해구 지음·발행처 역사문제연구소 '전두환과 80년대 민주화운동(2011)' 등.




이종길 기자 leemea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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