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리스 창 TSMC 창업자, 텍사스인스트루먼트서 승승장구
최후의 목표 CEO 승진 실패
계산기, 완구 만들던 부서 맡아 좌절감에 고민
결국 대만 정부 설득에 미국 떠나 대만 행
실패가 TSMC 설립 밑거름
텍사스인스트루먼트- TSMC로 두번의 반도체 전설 써
"세상에는 성공한 사람들이 많지만 진정한 영웅은 드물다. 성공과 임팩트에는 차이가 있다. 경력과 철학, TSMC, 전략, 핵심 가치를 고려하면 모리스는 산업 혁명이라는 학문이다." (젠센 황 엔비디아 창업자)
1983년, 20년 이상 희망해온 꿈을 잃은 남자. 모든 것을 잃고 밀려나듯 회사를 나온 반도체 엔지니어 겸 경영자는 약 30년 후인 2012년 모교 스탠퍼드 대학교의 엔지니어 영웅이 됐다. 모리스 창(Morris Chang) TSMC 창업자이다. 스탠퍼드대 엔지니어 영웅 전당에 오른 동양계 인사는 창과 젠센 황(Jensen Huang) 엔비디아(Nvidia) 창업자뿐이다. 반도체 분야로 확대해봐도 크레이크 배럿 전 인텔 회장, 최초의 마이크로프로세서인 인텔 4004를 설계한 마르시안 테드 호프 정도다. 창과 배럿은 같은 해 스탠퍼드대 엔지니어 영웅에 나란히 헌액됐다. 로버트 노이스(Robert Noyce), 고든 무어(Gordon Moore), 앤디 그로브(Andy Grove)에 이어 CPU 시대를 주도한 인텔의 CEO와 파운드리(Foundry)라는 새로운 업을 만든 창이 동일선상에서 평가받았다.
실리콘밸리 인재 배출의 기반이자 반도체 산업의 대표 인사들을 배출해온 스탠퍼드대가 창에 대해 이런 평가를 함부로 내리진 않을 것이다.
스탠퍼드대는 창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집적회로 파운드리 모델의 개척자(a pioneer of the dedicated integrated circuit foundry model). 반도체서 두 번의 전설을 썼다고 했다. 그리고 이런 대목이 더해진다.
"창은 스탠퍼드에서 학업을 마치고 텍사스인스트루먼트(Texas Instrument·이하 TI)에 돌아가 초기 이익을 포기하고 점유율을 늘려 장기적인 이익을 추구하는 반도체 전략을 도입했다."
반도체 시장에서 초기에 대규모 투자와 물량 공세, 그리고 가격 인하를 통해 경쟁자를 제압하는 치킨 게임을 처음 도입한 이가 창이라는 말이다. 1960년대에도 시작된 이 전략이 이제 업계의 기준이 되었다. 창은 그렇게 TI를 그 시대의 가장 크고 가장 수익성 높은 칩 제조업체로 만들었다.
창은 1958년 TI 입사 이후 최고경영자(CEO)라는 목표를 향해 끝없이 전진했다. 그가 TI의 반도체 생산 수율을 급격히 끌어올리며 고속승진이라는 엘리베이터에 탔던 것은 잘 알려져 있다. 거물 IBM과의 경쟁에서 승리하고 반도체 부문 부사장까지 맡았던 그가 왜 TI를 떠났는지에 대해서는 많이 언급되지 않고 있다.
TI의 본사는 텍사스주 댈러스에 있다. 텍사스는 미국 내에서도 가장 독특한 주다. 텍사스 인들은 자존심이 강하기로 유명하다. 텍사스주에서는 성조기만큼 주 깃발인 '론스타' 더 많이 휘날린다. 필자가 과거 AMD의 팹 탐방을 위해 텍사스주 오스틴을 방문했을 때도 론스타 깃발에 놀랐던 기억이 생생하다.
최근에야 타인종이 많이 유입됐지만 백인 중심의 보수성향이 강한 지역이다. 게다가 석유 때문에 개인들은 물론 주 재정도 탄탄하다. 자존감이 높을 수밖에 없다. 이런 지역적 여건에서 1980년대 초반 포천 500대 기업에서 아시아계, 일본도 아닌 대만계 CEO가 탄생하는 것은 불가능한 현실이었다. 창이 방황하고 있던 시절인 1982년 포천 500대 기업 순위 100위권에 포함된 정보기술 업체는 IBM(8위) AT&T(22위) 제록스(42위) TI(91위) 정도였다. 실리콘 밸리 기업은 단 한 곳도 순위에 없었다. 실리콘밸리의 아버지 기업 HP가 110위 휴대폰을 처음 만든 모토로라가 126위였다. 당시 TI의 위상이 얼마나 컸음을 미뤄 짐작할 수 있다. 그런 TI에 동양인 CEO의 자리는 없었다.
동양인은 사내 정치에서 패했다. 하버드, 스탠퍼드와 같은 미국 최고의 학교에 다녔고 큰 성과를 냈지만 보수 성향이 강한 미국 남부, 그것도 텍사스에서 동양인이 미국 대표 기업의 CEO가 되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 치기였다.
창은 반도체 전문가로 TI의 최고경영자를 꿈꿨지만, 현실은 냉정했다. 잭 킬비가 최초의 IC를 개발했을 당시 팀장이었던 마크 셰퍼드 회장의 위상을 뛰어넘는 것은 불가능했다.
창은 TI 말년은 반도체 엔지니어로서 비참했다. 그는 소비자기기 부분 책임자로 이동했다. 반도체 전문가가 계산기 사업을 맡게 된 셈이다. TI도 반도체를 활용한 소비재 산업으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던 때지만 소비자용 제품 사업부와 반도체 사업부는 부서 규모부터 엄청난 차이가 났다. 반도체 개발과 생산에 전념하던 이가 하루아침에 계산기 생산을 책임지게 됐을 때 느꼈을 패배감은 이해하기 어렵지 않다.
TI는 반도체 외에 소비자용 기기도 생산한다. 70년대 말부터 TI는 반도체에서 소비자용 기기에 공을 들이기 시작한다. 자체적으로 만든 반도체를 활용해 스스로 소비자용 기기를 만들었다. 계산기가 대표적이다. TI는 미국 고등학생들이 학기 초 필수적으로 구입해야 하는 준비물이다. 미국 수학 수 업은 계산기를 사용한다. 이 시장을 초기에 선점한 TI 계산기는 교육계의 표준이 됐다. 미국의 대학수학능력시험 SAT 시험장에도 TI 계산기를 들고 들어가야 한다.
당시 창이 주도한 완구도 있다. 스픽앤스펠(Speak & Spell)이다. 스픽앤스펠은 음성 합성 반도체를 기반으로 기획된 상품이다. 키보드에 단어를 입력하면 음성을 말해주었다.
스픽앤스펠이 등장한 영화 'ET'의 대흥행도 창에 즐거운 기억일 수 없다. 영화 속 ET가 인간, 나아가 자신의 고향과 소통하는 도구로 등장하는 완구가 스픽앤스펠이다. TI가 1978년 생산한 음성 합성 반도체를 활용하기 위해 만든 완구다. 키보드로 단어를 입력하면 발음해 주는 완구였다. 창은 이 완구가 꽤 성공했다고 말했다. 영화와 함께 스픽앤스펠은 큰 주목을 받았지만, 최첨단 반도체 생산에 평생을 바쳐온 창이 이런 기기에 쏠리는 주목을 즐길 수 있었을까?
당시 창이 당시 얼마나 낙담했는지는 여러 강연이나 인터뷰에서 확인할 수 있다.
창은 아무런 미래 계획 없이 무작정 TI를 떠났다. TI 입사 시점에 결혼 한 아내와도 이혼했다. 새 출발 할 이유가 충분했다. 반도체 엔지니어로서 창의 TI 시절 20년은 영광의 순간이었지만 마지막 몇 년은 잊고 싶던 순간이었다. 창은 글로벌 인스트루먼트라는 회사에 잠시 적을 뒀지만 이내 사직하고 대만 정부의 권유를 받아들여 낯선 땅으로 향했다.
만약 창이 TI의 CEO 자리에 올랐고 대만으로 돌아가지 않았다면 지금 반도체 업계는 어떤 모습일까. 아마도 지금의 파운드리 산업은 없었을 가능성이 크다. 퀄컴, 엔비디아는 반도체 설계를 제조해줄 팹을 찾지 못했을 수도 있다. 자금력이 부족한 AMD는 여전히 팹 투자 금액이 부족해 인텔에 밀려 이류 업체로 전전했을 수 있다. 애플 실리콘의 모습도 지금과는 달랐을 것이다.
백종민 기자 cinqange@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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