젠슨 황 "인텔 칩 생산 테스트 긍정적"
TSMC 벗어나 미국 내 칩 생산 신호탄
인텔, 무어의 법칙 강조하며 애플에도 구애
애플, 미국산 칩 사용 강조
팻 겔싱어 (Pat Gelsinger) 인텔 최고경영자(CEO)가 지난 5월 초 자신의 트위터에 성경 에베소서 4장 2절을 올렸다. 겔싱어는 실리콘밸리에서도 가장 열성적인 기독교 신자다. 겔싱어는 기독교가 중심인 아미시 마을 출신이지만 실리콘밸리에 도착 직후 교회에서 부인을 만나 더욱 독실한 신자로 거듭났다. 수시로 성경 구절을 트위터에 공유한다.
지난 5월 30일. 대만 타이베이시에서 열린 2023 컴퓨텍스 행사에서 젠슨 황(Jensen Huang) 엔비디아(NVIDIA) CEO가 한 말이다. 빅뉴스다. 오매불망 기다리던 소식이다. 겔싱어의 기도에 대한 응답일까. 400조원의 막대한 투자를 통해 미국 반도체 부활, 몰락한 러스트 벨트의 부활에 앞장선 인텔에는 가뭄 속 단비와 같은 소식이었다.
인텔과 엔비디아는 한때는 비교할 수 없는 관계였다. 인텔이 절대 '갑'이었다. 인텔의 CPU는 엔비디아의 GPU의 상위 존재였다. 거대한 산 같은 인텔을 향해 엔비디아는 실패를 경험 삼아 지속해서 성장했다. 엔비디아는 가상화폐 열풍과 인공지능(AI)이라는 로켓을 얻었다. 그 사이 인텔과 엔비디아는 친구에서 적으로 돌아섰다. 이런 관계를 지속할 수는 없다. 돌파구가 필요하다. 갈등은 잊고 사랑으로 서로를 배려하라는 성경 구절이 딱 들어맞는 대목이다.
2023년 현재 인텔과 엔비디아의 관계에서 갑은 엔비디아다. '탈 CPU'를 선언하고 파운드리 사업을 통해 미국의 반도체 생산 부활을 책임진 겔싱어는 '가죽 잠바의 사나이' 황의 지원이 어느 때 보다 절실하다.
황의 발언이 전해진 날, 미 주요 매체인 월스트리트 저널(WSJ)이 인텔 파운드리 사업이 퀄컴, 테슬라를 고객으로 확보하는 데 실패했다고 전했다. 결이 전혀 다른 두 개의 뉴스에 시장은 어떻게 판단했을까. 이날 인텔 주가는 3% 이상 올랐다. 시장은 엔비디아와 인텔의 관계에 무게를 뒀다.
반도체, 컴퓨터 전문 매체들도 일제히 황의 언급을 전하며 인텔에 서광이 비치기 시작했다고 전했다.
IT전문 블로그 탐스하드웨어의 평을 보자. 탐스하드웨어는 황의 언급은 엔비디아가 겔싱어가 추진 중인 인텔 파운드리 사업의 고객이 될 수 있다는 첫 신호라고 분석했다. 인텔은 이미 1.8나노 공정까지 추진하겠다고 밝혔지만, 팹리스 업체들의 신뢰를 얻기 위해서는 넘어야 할 산이 많다. 그 혈을 엔비디아가 뚫어줄 수 있다는 것은 상당한 의미가 있다. 올해 초 인텔은 3나노 공정 테스트를 중요 고객과 하고 있다고 밝힌 바 있다. 겔싱어는 당시 "클라우드, 엣지, 데이터센터 솔루션 공급업체가 인텔 3나노 공정의 고객이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한다"고 밝혔지만, 해당 업체가 어디인지는 공개하지 않았었다.
인텔 관련 발언에 대한 미국 내 관심이 커지자 황은 대만에 대한 배려도 잊지 않았다. 그는 TSMC에서 차세대 제품을 생산할 것이며 대만의 지정학적 위험에 대해 걱정하지 않는다고 했다. TSMC가 지정학적으로 불안해 투자를 중단한 워런 버핏과는 다른 시각이다. 황은 이번 대만 방문 기간 모리스 창 TSMC 창업자와 만나는 등 대만과의 관계 유지에도 공을 들였다.
애플 엔비디아 칩, 미국 생산 전환 시작됐다
현재 반도체 시장을 주도하는 팹리스는 애플과 엔비디아다. 애플은 단연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TSMC 최신 공정을 아예 독점해버릴 정도로 주문 양이 많다. 삼성전자 등 안드로이드폰과의 경쟁을 위해 최신 미세 공정을 도입한 칩에 대한 욕심이 강하다. 다른 기업들이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다.
TSMC는 애플과의 협력을 통해 파운드리 생태계를 지배하는 데 성공했다. 삼성이 제조하던 애플의 칩 생산을 뺏어오기 위한 모리스 창 TSMC 창업자의 영민한 투자전략도 적중했지만, 애플과 삼성의 소송이 없었다면 지금의 애플-TSMC의 관계는 애당초 불가능했다.
TSMC가 대만을 지키는 '호국 신산'이라고 하지만 주문을 맡기는 기업의 입장도 그럴까. 반도체 생산을 의뢰하는 팹리스들에 TSMC의 독주는 심각한 문제다.
반도체 생산을 맡기는 입장에서는 불리한 조건이다. TSMC와의 가격 협상에서 밀릴 수밖에 없다. 웨이퍼 한 장당 더 큰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 적절한 수율을 확보하지 못하면 더 비싼 비용을 지불하고 반도체를 생산해야 할 수도 있다. 공급망 안정을 위해 TSMC가 미국에서 반도체를 생산한다고 해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는다.
당연히 팹리스 업체들은 TSMC의 대안을 찾아야 한다. 삼성에서 TSMC로 옮겨간 한 대형 팹리스 업체 관계자의 말이다. "우리도 한 개 업체에서만 생산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팹리스 업체들은 한 파운드리 업체에 종속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대략 두 가지 이유가 있다. 먼저 생산 단가 협상력이다. 둘째는 더 중요한 이유일 수 있다. 위험을 회피하기 위해서는 복수 기업에서 생산하는 것이 좋다. 그래야 협상력도 향상된다.
과거 인텔과 퀄컴이 독점적 지위를 내세워 IT업계에서 절대 갑으로 행세했다면, 지금은 TSMC가 그렇다. 인텔이 미세공정에서 뒤처지고 삼성전자 파운드리에서 생산한 칩에서 발생하자 TSMC로의 쏠림 현상이 벌어졌다. 최신 칩을 TSMC에서 생산하기 위한 팹리스 업체들의 경쟁이 거세졌다. 자연스럽게 TSMC의 몫은 커졌다.
만약 TSMC가 미국에서 반도체를 생산하더라도 무조건 TSMC에만 장기간 생산을 의존한다는 것은 부담일 수밖에 없다. 결국은 대안을 찾아야 한다. 그 대안이 인텔과 삼성전자다.
겔싱어도 이런 사실을 잘 안다. 겔싱어가 '무어의 법칙'을 제안한 인텔 창업자 고든 무어의 사망을 애도한 팀 쿡 애플 CEO의 글에 단 댓글은 애플에 대한 '러브레터'로 보인다.
쿡은 무어에 대해 실리콘밸리의 아버지이며 진정한 선구자라고 했다. 이에 대해 겔싱어는 무어와 스티브 잡스 애플 창업자를 함께 거론하며 기술 선구자와 그들의 헌신에 대해 감사한다고 했다. 최근 겔싱어와 인텔은 무어의 법칙을 자신들이 이어가겠다는 의지를 연일 강조하고 있다. 2년마다 반도체의 집적도가 배로 늘어난다는 무어의 법칙은 미세 공정이 거듭되며 달성하기 어려워지고 있다. 인텔은 자신들의 IDM2.0 전략을 통해 무어의 법칙을 이어갈 테니 우리에게 칩 생산을 맡겨달라는 신호를 보내는 셈이다.
애플도 최근 미국산 반도체 사용에 대한 의지를 드러낸 바 있다. 애플은 지난달 브로드컴이 미국에서 생산한 FBAR필터를 사용한다고 발표했다. 수십억 달러 규모의 계약이지만 단연 돋보이는 부분은 '미국산'이라는 점이다. 쿡은 TSMC의 애리조나 공장에서 생산될 칩을 사용하겠다고 공언하기도 했다. 어쨌거나 미국에서 첨단 미세 공정을 진행할 수 있는 기업은 단 세 곳뿐이다. TSMC, 인텔, 삼성전자.
엔비디아의 경우는 좀 더 특수한 경우다. 대만 출신이 설립한 엔비디아는 AI 용 칩을 설계하고 생산은 주로 대만에서 한다. 미국의 입장에서는 전 세계 산업과 경제의 흐름을 바꿀 수 있는 게임체인저인 AI 칩이 중국의 코앞에서 생산되는 것을 바라보는 것이 불편하다. 중국에 AI 용 칩 수출을 금지했다고 하지만 결국은 미국에서 AI 칩을 생산하려 할 가능성이 크다.
미국 정부 입장에서는 미국인들이 주로 사용하는 스마트폰인 애플 아이폰용 A시리즈 칩과 AI 용 AI 칩만은 '메이드 인 아메리카'를 붙여야 한다.
다른 칩에 비해 AI와 애플용 반도체의 미국 내 생산은 미국 산업계는 물론 미국 정가의 지상과제다. 마침 TSMC의 행보도 불안하다. TSMC는 미국 내 반도체 공장과 비교해 대만 공장에 최신 미세공정을 적용한다는 방침이다.
90년대 이후 반도체 시장은 갈등과 화해의 연속이었다. 기업 간의 치열한 다툼은 오늘의 친구를 내일의 적으로 만든다. 어제의 적이 친구로 바뀌는 것도 순식간이다.
백종민 기자 cinqange@asiae.co.kr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