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이이슬 기자] 점입가경이다. 드라마 '설강화'를 둘러싼 논란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있다. 민주화운동 폄훼, 안기부 미화, 지수의 연기력 논란에 이어 작가의 '일베' 의혹까지 이어지며 방영 중단을 요구하는 비판의 목소리가 거세다.
지난 18일 베일 벗은 JTBC 드라마 '설강화'(각본 유현미·연출 조현탁)는 역사 왜곡 논란에 휩싸이며 뭇매를 맞고 있다. 이는 사실상 예고된 논란이었다.
지난 3월 SBS 드라마 '조선구마사'가 중국식 한복, 월병 등을 활용해 역사 왜곡 논란으로 2회 만에 종영한 바. 이와 함께 '설강화' 시놉시스가 언급되며 민주화 운동 폄훼 의혹을 받았다.
당시 유출된 '설강화'는 원제 '이대기숙사' 시놉시스 내용이 이러한 우려를 샀다. 남자 주인공이 '운동권인 척하는 간첩'이라는 점과 또 다른 등장인물이 안기부 팀장이지만 '정의롭고 대쪽같은 인물'로 소개된 것을 두고 민주화 폄훼, 안기부 미화 논란이 불거졌다.
당시 안기부가 민주화운동을 하던 사람들을 고문하며 '간첩'이라는 누명을 씌웠다는 점. 이로 인해 억울하게 고초를 겪고, 목숨까지 잃은 운동가들이 존재하는 바. 심각한 역사 왜곡이라는 지적이 이어졌다.
여자 주인공 이름이 영초라는 점도 1970년대 민주화운동을 이끌었던 천영초에서 따온 게 아니냐는 의혹과, 남파 간첩인 남자 주인공의 이름 임수호도 임종석, 임수경 등을 연상시킨다는 지적을 받았다. 특히 임수호가 '재독교포 출신 명문대 대학원생'이라는 설정이 '동백림 간첩 조작 사건'을 연상시킨다는 우려도 나왔다. 이후 제작진은 이를 의식한 듯 주인공의 이름을 영초에서 영로로 바꿨다.
제작을 반대하는 목소리는 청와대까지 전해졌다. 드라마 제작 중단을 요구하는 국민청원에 20만 명 이상이 서명할 만큼 공분을 샀지만, 정부는 제작 단계인 만큼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고 답변했다. 이후 문제가 되는 부분에 관해서는 "방송통신심의위원회를 거치게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자 JTBC 측은 "설강화'는 민주화 운동을 폄훼하고 안기부와 간첩을 미화하는 드라마가 결코 아니다"라며 "현재의 논란은 유출된 미완성 시놉시스와 캐릭터 소개 글 일부의 조합으로 구성된 단편적인 정보에서 비롯됐고, 파편화된 정보에 의혹이 더해져 사실이 아닌 내용이 사실로 포장되고 있다"고 해명했다.
이어 방송을 앞두고 진행된 '설강화' 제작발표회에서 조현탁 감독은 "1987년을 배경으로 하지만 군부정권이라는 것 외에 모두 가상의 인물, 가상의 배경"이라며 "청춘 남녀의 애절한 사랑 이야기를 담기 위한 설정"이라고 말했다.
지난 18~19일 '설강화' 1·2회가 공개되자 논란은 더욱 거세졌다. 대중은 앞서 내놓은 JTBC와 제작진의 입장이 궤변에 불과하다며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다.
온전히 '가상'의 창작물로 존재하려면 배경이 되는 군부정권, 대선정국과 무관한, 새롭게 창작된 인물이야 했다. 80년대 군부정권에 맞서 민주화운동을 하는 캐릭터가 등장하고, 이러한 상황에서 안기부에 쫓기다 총을 맞고 대학 기숙사에 숨어든 '간첩'이라는 설정이 어떻게 시대 배경과 독립될 수 있나. 당시 군부의 억압과 반공 이데올로기로 피에 물든 수많은 학생, 희생과 아픔으로 기억되어야 할 시대를 지우고 드라마의 줄거리와 캐릭터를 설명할 수 있는지 묻고 싶다.
공개된 '설강화'는 예상대로 집중 포화를 맞았다. 1회에서 간첩인 임수호가 안기부에 쫓겨 도망갈 때 배경 음악으로 민주화 운동 당시 사용된 안치환의 '솔아 푸르른 솔아'가 삽입됐는데, 간첩과 안기부의 추격 장면에 적절하지 않은 배경음악이라는 지적이 이어졌다.
2회는 더 심각했다. 임수호(정해인 분)가 간첩이라는 것이 직접적으로 그려진 것. 그가 과거 북한에서 동생과 이별하는 장면, 군복 차림에 김일성 위원장 배지를 달고 있는 정해인의 모습이 나오며 간첩 설정을 분명하게 보여줬다.
총을 맞고 여대 기숙사에 숨어든 임수호를 지키기 위해 영로가 기숙사 직원인 할아버지에게 도움을 구하는 장면도 문제가 됐다. 할아버지는 "혹시 간첩 아니냐"며 간첩을 돕는 행위는 위법이니 도울 수 없다는 의사를 표하자, 영로는 "대모하는 학생들은 무조건 빨갱이로 내몬다"며 임수호를 두둔했다.
더불어 영로와 같은 기숙사 룸메이트 여대생들이 안기부 여성 요원 장한나(정유진 분)에게 맞서 알몸으로 임수호를 구하는 장면도 문제가 됐다. 당시 안기부 요원들은 피도 눈물도 없이 악행을 자행하던 바. 그런데도 영로는 "아줌마"라고 외치며 호기롭게 나서 임수호를 위기에서 구한다. 안기부 요원은 바들바들 떠는 여대생들을 보며 "왜 이렇게 떨지?"라며 의심하는 장면이 그려졌다.
당시 대학생들이 안기부 요원에게 당당히 맞서고 이에 아무런 액션 없이 물러나는 요원의 설정은 설득력이 부족하다는 것. 아울러 안기부 요원을 그럴듯 하게 포장하며 서사를 부여하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된다는 지적이다. 더군다나 알몸으로 간첩을 구하는 설정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반응이다.
정유진의 소속사 FNC엔터테인먼트는 지난 19일 공식 보도자료를 통해 "안기부 최초 여자 요원인 한나가 첫 등장 했다. 한나는 동서독에서 잔인하게 살인 후 서울로 잠입한 ‘대동강 1호’를 잡기 위한 강단을 보여줬다"고 했다. "한나는 모두가 혀를 내두를 정도로 충동적이고 다혈질이지만 이루고자 하는 일에는 거침없이 뛰어드는 열정을 가진 인물"이라고 소개했다.
소속사와 배우가 어떠한 마음가짐으로 배역과 '설강화'를 바라보고 있는지 짐작하게 한다는 반응이다. 아무리 소속 배우의 홍보가 중요했어도, 안기부 요원을 설명하며 '이루고자 하는 일에 거침없이 뛰어든다'거나 '강단을 보여줬다'고 표현하는 것은 아쉽다.
유현미 작가의 '일베' 의혹도 속속 고개를 들고 있다. 일각에서는 목욕탕 장면에서 임수호의 얼굴에 씌우는 수건에 대학교 개교기념일로 5월16일 날짜가 인쇄돼 있는데, 이는 박정희의 5.16 군사정변을 연상케 한다고 지적했다. 여기에 더해 거리에 달린 현수막에 인쇄된 행사의 일시가 민주화운동이 일어난 5월 18일인 것을 두고 '의도적인 게 아니냐'는 의혹도 나왔다.
배우 정해인과 아이돌 그룹 멤버 지수를 주연으로 내세운 '설강화'는 자신만만했다. 드라마를 보고 판단해달라며 큰소리쳤지만, 방송이 공개된 후 더욱 비판의 목소리가 거세다. 이를 의식한 듯 제작진은 빠르게 시청자 반응을 차단했다. 시청자 게시판과 네이버톡 채널을 비공개로 전환하며 소통 창구 모두 폐쇄했다.
앞서 '설강화'는 온라인으로 진행된 제작발표회를 전 세계 시청자들에게 공개하며 슈퍼챗(채팅을 통해 현금을 후원하는 유튜브의 시스템)은 열어두는 황당한 행태를 보였다. 통상적으로 온라인으로 진행되는 제작발표회는 취재진 외에 일반 시청자들에게는 비공개로 진행되지만, 아이돌 배우의 한류 팬덤을 의식한 듯 제작진은 공개 형식으로 진행했다. 그런데 슈퍼챗 기능을 막아두지 않아 수많은 팬이 슈퍼챗을 쏟아내는 촌극이 벌어진 것이다.
슈퍼챗은 열어두면서 시청자 소통 채널은 재빠르게 막아버린 '설강화' 제작진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논란은 여기서 끝이 아니다. 영로 역을 맡은 지수의 연기력 논란도 거세다. 극을 이끄는 주요 배역인 만큼 적절한 연기력이 요구되는 자리. 그러나 지수는 아이돌 그룹의 한계를 여실히 드러내며 기대에 못 미친다는 반응을 얻고 있다. 웅얼거리는 발성과 발음이 문제로 지적되며 '자막이 필요하다'는 말까지 나오는 상황이다.
여기에 더해 정해인도 역풍을 맞았다. 그는 '설강화' 방영을 앞두고 진행한 인터뷰에서 "내가 88년생이다. 1987년은 직접 겪어보지 못한 시대"라며 "당시를 배경으로 한 작품이 많기도 하지만, 사실 정답은 다 대본에 있다고 생각한다. 대본을 잘 들여다보면 머릿속으로 그림이 그려진다"고 말했다.
이는 배역과 작품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드러나는 대목. 역사적 사실과 배경을 제대로 숙지하지 않은 채 가볍게 창작물을 대하는 태도가 아쉽다는 지적이 나온다.
시끄러운 논란에 '설강화' 후원 기업들은 '손절'에 나섰다. 티젠, 도평요, 한스전자 등은 "드라마 방영 후 논란에 관해 알았다"며 제작사에 광고 중단을 요청할 계획임을 밝혔다.
창작자로서 지녀야 할 역사의식과 책임감 부재에 대한 질타가 거세다. '설강화'가 대중의 목소리에 귀를 막고 계속 방송을 강행할까. 앞서 사전제작으로 촬영을 마쳤기에, 수정도 불가피할 터.
'설강화'는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디즈니플러스를 통해 전 세계에 공개되고 있다. 아마 해외 시청자들은 역사적 배경을 가볍게 치부하고 '왕자와 공주의 이야기 쯤'으로 소비하며 받아들일 것이라는 점이 안타깝다.
가슴 아픈 역사인 5.18 민주화운동을 다룬 KBS 드라마 '오월의 청춘'이 다시금 떠오른다. 당시 이강 작가는 "역사에 없는 사실은 한 줄도 적지 말자는 각오로 임했다"며 남녀 주인공의 사랑 이야기를 그리면서도 사려 깊은 태도로 호평을 이끈 바 있다.
민주화운동을 간첩 소행이라 폄훼하는 일이 2021년 TV 드라마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건 너무나 큰 충격이다. 더 봐야 할 이유가 있을까. 종합편성채널 JTBC의 결단이 필요할 때다.
이이슬 기자 ssmoly6@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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