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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영화 전성기의 땅 사라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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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양주종합촬영소 22년 만에 아쉬운 폐관

한국영화 전성기의 땅 사라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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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산벌·왕의 남자·춘향뎐·박하사탕 등 수많은 영화의 고향, 이준익 감독 '자산어보'로 마침표

촬영 역학까지 반영 유일한 세트장…낡은 기와·부서진 담 세월의 흔적 역력 "영화인들에게 만남의 장"

영진위 부산종합촬영소 건립 계획…일정조차 안 나와 3~4년 공백


영화 ‘취화선(2002)’에서 장승업(최민식)은 불타는 가마를 응시하며 화부에게 묻는다. “자네는 어떤 그릇이 나오기를 원하는가.” “선생님 같은 화공들은 철사가 잘 녹아 그림이 온전히 살아 나오길 기다릴 것이고, 유약 바른 사람들은 유약이 잘 녹아 흘러내리길 바랄 것이고, 가마 주인은 한두 점 명품이 나오길 소원하겠죠. 하지만 어디 그게 도공들 마음대로 되는 일인가요? 불이 말하는 거지요.”


인간이 제어할 수 없는 영역이다. 예술의 근원은 자연. 끊임 없이 교감하며 섭리를 터득해야 완성된다. 흙먼지 속에서도 흰 꽃을 피우는 질경이처럼. 남양주종합촬영소 취화선 야외세트는 그렇게 17년을 버텼다. 낡은 기왓장, 부서진 담벼락, 휘어진 나무 기둥. 배우 설경구는 지난달 31일 곳곳을 둘러보며 ‘세월의 흔적’이라고 말했다.


“저기 벽 좀 보세요. 나무가 썩어서 틈새가 생겼어요. 바람과 비, 눈에 씻긴 흔적이 고스란히 남았죠. 이런 멋과 분위기는 인위적으로 만들 수 없습니다.”


‘취화선’을 찍으려 만든 세트다. 기와집 26채, 초가집 31채, 주막, 골목길 등으로 19세기 말 서울 종로를 재현했다. 정일성 촬영감독의 조언에 따라 인물과 카메라 동선을 고려해 지어 사극 제작진이 가장 선호한다.


이날도 배우와 스태프 100여명이 곳곳에서 분주하게 움직였다. 이준익 감독의 ‘자산어보’ 마지막 촬영 날이었다. 흑산도로 유배당한 정약전(설경구)이 섬 청년 창대(변요한)와 만나 신분과 나이까지 초월한 우정을 나누며 조선 최초 어류도감 '자산어보' 집필에 나선다는 내용의 영화다.


한국영화 전성기의 땅 사라지다


‘자산어보’는 남양주종합촬영소에서 찍은 마지막 작품이다. 남양주종합촬영소는 이 영화를 끝으로 개관 22년 만에 폐쇄됐다. 영화진흥위원회가 2013년 부산으로 이전하면서 2016년 부영그룹에 촬영소 부지와 시설을 넘겼다. 매각 가격은 1100억원. 지난해 5월 관람 체험 시설 운영을 중단했고, 이날 촬영소 운영도 마감했다.


이준익 감독에게 남양주종합촬영소 야외세트 촬영은 ‘황산벌(2003)’, ‘왕의 남자(2005)’에 이어 세 번째다. 시간이 꽤 흘렀으나 “컷, 오케이”를 외친 순간은 또렷히 기억했다. “저쪽에 있는 집에서 ‘황산벌’의 계백(박중훈)이 처자식을 칼로 베었지. 그 옆집에서는 ‘왕의 남자’의 육갑(유해진)이가 재주를 넘었고.”


촬영을 응원하러 온 조철현 감독은 “이 감독이 이곳에서 찍은 영화들은 모두 흥행했어요. 7스튜디오에서 찍은 ‘사도(2014)’도 600만명 이상을 동원했죠”라며 웃었다. 그는 남양주종합촬영소에 있는 춘사관에서 ‘평양성’과 ‘사도’ 시나리오를 썼다. 춘사관은 객실 43개를 갖춘 숙박 시설이다.


조 감독은 “글에 몰두하기 좋은 환경”이라며 “숙박비와 밥값도 싸서 자주 이용했죠”라고 말했다. 이어 덧붙였다. “영화인들이 한데 모여 지내니까 별의별 일들이 많았죠. 저도 임권택 감독님의 조감독한테 조용히 해달라는 요청을 받은 적이 있어요. 새벽 2~3시에 시나리오를 쓰고 보조작가와 시연했는데, 감정에 몰입한 나머지 목소리를 크게 내고 말았습니다(웃음).”


한국영화 전성기의 땅 사라지다 남양주종합촬영소 영화 소품들./남양주=김현민 기자 kimhyun81@


춘사관은 설경구에게도 익숙한 장소다. 촬영 뒤 영화인들과 자주 회포를 풀고 잠들었다. 설경구의 말이다. “거기서 묵으면 긴장이 확 풀려 몸과 마음이 느슨해져요. ‘타워’를 촬영할 때 딱 한 번 지각하기도 했죠. 많이 늦지는 않았어요. 허겁지겁 달려가니까 금방이더라고요(웃음).”


그가 남양주종합촬영소에서 처음 찍은 영화는 ‘박하사탕(1999).’ 김영호(설경구)가 잠복근무차 찾은 군산의 허름한 옥탑방에서 카페 여종업원의 품에 안기는 장면을 6스튜디오에서 촬영했다.


“생생하게 기억하죠. 구슬픈 베드신이라서 긴장했거든요. 바로 옆 스튜디오에서 ‘춘향뎐(2000)’을 찍고 있었어요. 이창동 감독님과 함께 임권택 감독님께 인사를 드렸죠. 영화인들에게 만남의 장 같은 곳이었어요. 여기 야외세트도 개장했을 때 (최)민식이형을 응원하려고 왔었죠. 공교롭게 이곳의 시작과 끝을 모두 목격하게 되네요. 착잡해요. 모든 영화인들이 그렇게 느낄 거에요. 얼마 전 촬영을 응원하러 온 (전)도연씨도 그러더라고요. 많은 추억이 묻은 장소가 사라져서 아쉽다고.”


조철현 감독의 얼굴에도 짙은 감회가 서려 있었다. 그는 “한국에서 가장 가치 있는 세트의 마지막 풍경이라고 생각하니까 마음이 아픕니다”라고 말했다. “중국의 처둔 야외세트처럼 촬영 역학까지 반영해 지은 세트는 국내에 이곳이 유일하거든요. 후배들이 선배들의 흔적을 고스란히 물려받을 줄 알았는데, 이렇게 한순간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고 하니 믿기지 않네요.”


한국영화 전성기의 땅 사라지다


이준익 감독은 “행정가들의 실수가 초래한 안타까운 결과”라고 쓴소리를 내뱉었다. “고(故) 곽정환 서울극장 회장과 함께 기공식에 참석해서 깜짝 놀랐지. 가파른 언덕인데다 상수원 보호구역이라서 테마파크 등으로 확장할 여지가 전혀 없더라고. 그래도 한국영화의 전성기에 크게 일조했어. 그 역사만으로도 영구히 보존할 가치가 충분하지. 그런 곳을 부수고 다시 짓는 건 낭비야.”


취화선 야외세트의 하루 대여료는 70만원. 다른 스튜디오와 세트 대여료도 50만원 안팎이다. 정부가 운영해서 비교적 낮은 가격에 제공됐다. 최근 영화계는 표준 근로계약서 작성 등으로 인건비가 급상승했다. 남양주종합촬영소 폐쇄로 부대시설 사용료마저 높아진다면 제작에 어려움이 따를 수밖에 없다.


이준익 감독은 “제작비가 늘어나면 영화관람료가 상승해 결국 국민의 부담만 커지게 된다”고 지적했다. “가까운 중국만 해도 국가적 차원에서 영화세트를 효과적으로 운영해. 당ㆍ송ㆍ원ㆍ명ㆍ청 시대로 나눠서 관리하지. 우리나라 세트에는 그런 운영 노하우가 없어. 대부분 방송국 소유이기도 하고. 남양주종합촬영소가 영화를 위한 유일한 세트라고 봐도 과언이 아닌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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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진흥위원회는 ‘포스트 남양주 시대’를 예고한다. 부산 기장군에 부산종합촬영소를 지어 운영할 계획이다. 그러나 부지만 확정됐을 뿐 착공 일자조차 정해지지 않았다. 건립부터 가동까지 3~4년이나 걸릴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촬영소를 사들인 부영그룹은 해당 부지와 시설을 어떻게 활용할지 고민하고 있다. 일부 건물의 누수 현상 등을 이유로 잔금을 모두 지급하지 않아 소유권은 아직 영화진흥위원회에 있다.




남양주=이종길 기자 leemea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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