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홍 감독 '우키시마호'
“영령들이여! / 이제 잠드소서! / 당신들의 분노와 / 당신들의 비통과 / 당신들의 그리움일랑 / 이제는 역사의 뒤안길에 던져두시고 / 당신 앞에 꿇어엎드린 / 후손들의 한 맺힌 참회를 받아주소서.”
우키시마호폭침진상규명회 전재진 회장이 저서 ‘우키시마호 폭침사건진상’에 실은 시 구절이다. 우키시마호 폭침사건은 일본 아오로리 현과 인근에서 강제노동한 조선인 노동자와 가족이 해방에 맞춰 귀국길에 올랐다가 당한 참사다. 오미나토에서 출발해 부산으로 향하던 배가 돌연 마이즈루항으로 기항하다 원인을 알 수 없는 폭발로 침몰했다. 수천 명이 목숨을 잃었다.
사건이 발생하고 74년이 지났으나 원인은 규명되지 않았다. 크게 두 가지 주장이 제기된다. 일본의 고의적 격침(자폭설)과 미국 기뢰에 의한 침몰(촉뢰설)이다. 지난 19일 개봉한 다큐멘터리 ‘우키시마호’는 생존자 약 여든 명의 증언과 각종 문서들을 근거로 전자에 무게를 둔다. 증언은 상당히 구체적이다.
“(8월)23일 오후 7시 경에 갑판 위에 올라가서 가만히 앉아 있으니까, 그 옆에 난간에 기대서 해군병사 둘이 마주서서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밑에는 한 여인이 어린아이에게 젖을 먹이고 있었습니다. 그 젖 먹는 아이를 (해군이) 서서 내려다 보면서 ‘저 불쌍한 어린애가 꽃 몽우리도 피우지 못하고 가게 생겼으니 큰일이다’라고 했습니다(故 정기영).”
“배가 떠가지고 (가고 있는데) 밤이 되어서 (일본 해군이) 물건을 자꾸 물에 내버리는 거야. 신발이고 옷이고 좋은 것을 던지는 거야(故 최억조).”
“동해안을 향해오는 도중에 반쯤 왔는데, 해군 놈들이 장교는 몇 명인지는 모르겠는데 안 타려고 했던 모양이야. 위험하다는 걸 알았겠지(故 윤재로).”
“(일본 해군이) 이부자리 책상 같은 물건 말이야. 문서 같은 걸 (바다에) 집어던져. 이상하다 싶어 여럿이 모여 쑥덕거렸지(故 김태석).”
“(일본 놈들이) 보트로 나가는데 몇 명 안되더라고. (故 박재하)”
“보트 타고 내 뺀 뒤에 ‘쾅’하고 폭발했죠.(故 김달수)”
“선원들이 내리는 것을 봤거든. 다 내리고 저기로 떠나고 한참 있다가 폭발했지(故 김수득).”
일본 역사상 가장 큰 해상 사고. 그런데 당시 현지 신문들은 기사화하지 않았다. 인양이 이뤄지는데도 9년이 걸렸다. 오사카 국제신문은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우키시마호의 침몰 원인에 대해서는 갖가지 추측이 있지만, 결국 조작에 따른 것과 촉뢰에 따른 조난일 것이라는 두 가지 설로 좁혀진다. 어느 쪽이 사실인지는 아직도 판정되지 않은 것 같다. 이 사건은 종전 직후라서 혼란이 한창일 때 벌어진 일이기도 하며, 더구나 시일이 상당히 경과했으므로 결정적인 증거를 찾아내기에는 대단히 어려운 형편에 놓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여러 가지 의혹을 남기고 있다. 촉뢰로 인한 침몰이라면 선체의 바깥쪽에서 안쪽으로 구멍이 뚫려야 하는데 인양한 배의 바닥 구멍은 바깥 방향으로 뚫려 있다. 우수한 외항선이면서, 음료수 보급이라는 명목으로 왜 마이즈루에 기항해야 했을까? 생존자들은 침몰 직전 폭발 소리를 세 번 연속해서 들었다고 말하고 있다. 만약 촉뢰에 의한 것이라면 이런 현상은 없다.”
자폭설과 촉뢰설을 떠나 일본의 이른 한국인 노동자 수송부터가 잘못된 결정이다. 인명에 대한 안전문제가 전혀 고려되지 않은 까닭이다. 전 회장은 우키시마호 폭침사건진상에 “전쟁터로 가는 것이 아니었다. 더구나 전시가 아닌 평상시에 다른 나라 사람을 자국으로 돌려보내는 일이었으므로 (일본은) 무엇보다 목적지까지 무사히 보내줄 책임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안전성을 확보하지 않은 채 무리하게 우격다짐으로 배를 출항시켰다”라고 썼다. 종전 당시 일본 주변의 해안에는 일본 해군이 부설한 기뢰가 5만347개가 있었다. 미군이 B29와 잠수함을 동원해 부설한 감응기뢰도 1만703개가 있었다. 마이즈루 방위대 지휘관이었던 해군 대위 사토 고시치에 따르면, 우키시마호가 입항한 마이즈루 만에도 B29 예순네 대에 낙하산을 달아 투하한 기뢰가 465개나 됐다. 여기서 약 200발은 종전시까지 제거되지 않았다. 목적지인 부산항에도 기뢰 수백 개가 제거되지 않은 채 남아 있었다. 전 회장은 “위험천만한 바다를 항해하기 위해서는 미군이 설치한 기뢰는 어쩔 수 없다손 치더라도 적어도 일본 해군이 부설한 기뢰의 위치를 알 수 있는 기밀해도 정도는 갖추고 있어야 했다. 그러나 우키시마호에 주어진 것은 일반 해도뿐이었다”고 했다.
전 해군 상등병 사이토 쓰네지는 “해군의 기밀해도가 없었으므로 항해할 만한 여건이 아니었다. 당시 오미나토에 중유가 부족해서 우키시마호에 부산항까지 편도분의 연료밖에 싣지 못했다”고 했다. 우키시마호에 승선한 해군 사병들이 “절대로 가지 않겠다”며 완강하게 저항했던 이유다. 일본 정부는 군도까지 뽑아 위협하며 출항을 종용했다. 전쟁터로 가는 것을 거부하는 군법 위반이면 몰라도, 전쟁이 끝난 평상시에 한국인을 돌려보내려고 무력을 사용했다는 점은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다.
이 다큐멘터리는 일본 정부에 다양한 의혹을 제기한다. 왜 서둘러 출항해야 했으며, 왜 교토 쪽으로 회항했는지, 부산을 왕복할 만한 연료도 없이 출항한 이유가 무엇인지, 마이즈루에 입항할 당시 해군들이 왜 자신들의 소지품을 모두 바다에 던졌는지 등이다. 이 사건을 얼마나 성의있게 사후 처리했는지 또한 묻는다. 일본 정부는 의혹을 해소하기 위해 여러 가지 자료를 공개해야 한다. 우키시마호의 국적 증서를 비롯해 아오모리 현의 한국인 노무자 송환 계획서, 우키시마호 출항계, 우키시마호 입항계, 우키시마호 승선 한국인 명단, 우키시마호 해군 승무원 명단, 마이즈루만 내 부설기뢰 위치도, 연합군 부설기뢰의 종류와 파괴력표, 우키시마호 승무원들의 최근 현황, 우키시마호 항해일지, 아오모리 현으로 강제연행된 한국인 명단 등이다. 모두 한국정부의 적극적인 요청과 행동을 필요로 한다.
이종길 기자 leemea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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