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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혜의 그림으로 읽는 서양예술사]다이아몬드와 트랙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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얀 판 에이크 作 '수태고지'

[이미혜의 그림으로 읽는 서양예술사]다이아몬드와 트랙터 얀 판 에이크, '수태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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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가 마리아 앞에 나타나 수태를 알리는 장면은 중세 이래 종교화에서 자주 다뤄진 소재다. 얀 판 에이크의 '수태고지'는 유난히 폭이 좁고 길어서 세 폭 제단화의 왼쪽 날개였으리라 짐작된다. 아깝게도 다른 부분은 사라지고 없다. 판 에이크의 작품 중 오늘날 남아 있는 것은 스물두 점의 유화와 세 점의 드로잉뿐이다. 규모가 크고 정교한 이 작품은 워싱턴 내셔널 갤러리 오브 아트의 자랑거리다.

수태고지는 누가복음에 나오는 구절에 근거한다. 가브리엘 대천사가 마리아 앞에 나타나 말한다. "은총을 가득히 받은 이여, 기뻐하여라. 주께서 너와 함께 계신다." 천사가 갑작스레 나타나 말을 건네자 마리아는 어리둥절하며 당황한다. 천사는 마리아가 성령에 의해 아기를 가졌으며 그 아기는 야곱의 후손 다시 말해 인간을 영원히 다스리는 왕이 되리라고 일러준다.


이런 난데없는 일을 당하면 여자들은 보통 어떻게 반응할까. 나라면 "누구 맘대로 아기를 갖게 하고 낳으라 하십니까? 싫습니다"하고 단칼에 거절할 것 같다. 그러나 마리아는 이렇게 답한다.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지금 말씀대로 저에게 이뤄지기를 바랍니다."

판 에이크는 그림에 오늘날의 만화처럼 천사와 마리아의 대화를 적어 넣었다. 천사 옆에 "은총을 가득히 받은 이여", 마리아 옆에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라는 라틴어가 쓰여 있다. 재미있는 것은 천사가 마리아에게 하는 말은 정상적 어순이지만 마리아의 대답은 글자가 뒤집혀 있고 역순이다. 하느님에게 하는 말이라 생각해서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시선을 염두에 둔 것이다.


이 그림을 주문한 사람은 누군지 알 수 없지만 씀씀이가 호탕했던 것이 분명하다. 화가는 값비싼 청람색을 마음껏 풀어 마리아의 드레스를 칠하고, 비둘기로 화한 성령에서 나오는 일곱 가닥의 빛은 진짜 금박으로 칠했다. 또 기량을 최대한 발휘해 이 부유한 주문자의 요구에 부응하려고 노력했다. 무지개 색으로 변하는 천사의 날개, 가운의 금빛 광택과 질감, 영롱한 빛을 발하는 보석과 진주가 손에 잡힐 듯하다.


전근대 그림이 다 그러하지만 이 그림에는 상징과 은유가 가득하다. 뒤편 벽 꼭대기에는 서있는 여호와를 묘사한 스테인드글라스가 있고 그 양옆에는 이집트 공주가 모세를 발견하는 장면과 모세가 십계명을 받는 장면이 그려져 있다. 벽 아래 부분의 고딕식 아치 뒤로 세 개의 유리창이 보인다. 이 세 유리창은 성부, 성자, 성령 즉 삼위를 의미한다. 앞쪽에 있는 붉은 스툴은 옥좌, 다시 말해 예수를 가리킨다. 바닥 타일에는 다윗이 골리앗의 목을 베는 장면, 삼손이 신전의 기둥을 무너뜨리는 장면 등이 그려져 있다.


중세 사람들은 골리앗을 제압하는 다윗에게서 악마를 제압하는 예수를, 신전의 기둥을 무너뜨리는 삼손에게서 최후의 심판을 보았다. 즉 압축된 성경처럼 구약에서 시작해 신약으로 이어지는 이미지들이 나열되어 있다. 마리아 앞에 놓인 책이 귀족 여성들이 읽던 일반 성무일과서보다 훨씬 크고 두꺼운 것은 마리아의 교양이 남보다 깊음을 의미하며, 탁자 앞의 흰 백합 화병은 그녀의 정결함을 나타낸다.


1817년 400년 가까이 어딘가에 숨어 있던 이 그림이 파리의 경매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훗날 빌렘 2세가 될 네덜란드 왕자가 이 그림을 샀다. 그는 사치스러운 생활을 즐겼고 빚까지 내서 예술작품을 수집했다. 1849년 빌렘 2세가 세상을 떠나자 왕실은 컬렉션의 일부를 처분했다. 러시아의 차르 니콜라이 1세가 '수태고지'를 샀다. 그림은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에르미타주 궁전으로 가게 되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는 여름에는 아주 덥고 겨울에는 아주 추운 곳이다. 온도차가 심하면 패널화는 뒤틀어져서 금이 가게 된다. 온습도 조절장치가 필요하지만 당시만 해도 그런 기술이 없었다. 러시아 왕실의 미술품 관리자들은 패널화의 나무 부분을 제거하고 물감이 입혀진 표면을 떼어내 캔버스에 옮겨 붙이는 방법으로 이 문제를 해결했다. 안면이식 수술을 연상하게 하는 고난도의 작업으로 자칫하면 그림을 완전히 망가뜨릴 수 있는 위험한 방법이었다. 이렇게 해서 캔버스화로 다시 태어난 패널화가 상당수 된다. 판 에이크의 '수태고지'는 1860년대 후반 캔버스로 옮겨졌다.


이 그림에 얽힌 우여곡절은 이것으로 끝이 아니다. 1917년 볼셰비키 혁명이 일어나자 왕실 재산은 몰수되어 국유화되었다. 혁명 후 소비에트 정부의 최우선 과제는 낙후된 경제와 사회를 개조하는 것이었다. 특히 경제를 일으키는 데 혁명의 성공과 실패가 달려 있었다. 정부는 필수적 기간산업과 사회간접자본 시설을 건설하는 데 전력했다. 문제는 이를 위한 자금 조달이었다. 산업화를 하려면 서구의 기술력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데 미국과 독일은 기술이전 비용에 대해 현금 지불을 요구했다. 미국은 1933년까지 소련을 정식 국가로 인정하지도 않았는데 차관을 줄 리가 없었다. 소비에트 정부는 궁여지책으로 몰수한 미술품과 보물을 팔기로 했다. 귀족, 부유층, 교회로부터 몰수한 성상, 가구, 보석류를 먼저 팔아넘겼고, 1928년부터는 에르미타주 미술관에 있는 그림을 팔기 시작했다.


미국의 부호 앤드루 멜런은 자신이 거래하던 화랑으로부터 소비에트 정부가 미술품을 판다는 소식을 입수했다. 멜런은 가족 사업이었던 은행업을 바탕으로 알루미늄 산업ㆍ유전ㆍ탄광 등에 투자해 억만장자의 반열에 올랐으며 1920년부터 1932년까지 재무장관 자리에 있으면서 자유방임주의 경제정책을 주도한 인물이다. 1930년 4월부터 1931년 4월까지 멜런은 판 에이크, 라파엘로, 렘브란트의 걸작이 포함된 스물한 점의 그림을 구입했다. 가장 비싼 것은 라파엘로가 그린 '알바의 성모'로 170만달러였으며 전체 총액은 약 700만달러에 달했다. 1930년 소비에트가 미국과 공식적으로 거래한 수출액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거금이었다.


미술품 거래는 극비리에 이루어졌다. 소비에트 관료들은 일반 대중에게 미술품 매각 사실이 알려지는 것을 꺼렸고, 멜런 역시 적당한 시기가 도래할 때까지 이 일을 비밀로 유지하고 싶어했다. 1929년 대공황의 여파로 수많은 사람들이 직장을 잃고, 은행과 기업이 줄줄이 파산하는 마당에 재무장관이 그림 사는 데 돈을 펑펑 썼다는 것은 사회적 지탄을 받을 만한 일이었다.


그 '적당한 시기'는 의외로 빨리 찾아왔다. 그림을 산 후 승승장구하던 멜런의 인생은 내리막길로 접어들었다. 대공황에서 벗어나는 것은 시장에 맡겨두어야지 정책적 개입을 통해 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그의 발언은 여론의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이것은 말 실수가 아니라 그의 신념이었다. 하딩 대통령 때 재무장관에 임명되어 쿨리지, 후버로 대통령이 바뀌는 동안에도 까딱없던 이 사나이는 대공황을 초래했다는 오명을 짊어지고 1932년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해에 민주당 후보로 나서 대통령에 당선된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멜런에게 공화당 정부의 경제정책 실패에 대한 책임을 묻는 한편 그를 악덕 자본가의 본보기로 손을 보고자 했다. 국세청과 법무부 세무조사위원회의 조사가 시작되었다. 국세청은 별다른 혐의가 없다는 결론을 내렸지만 세무조사위원회는 조사를 계속 이어갔고 1934년 멜론을 탈세 혐의로 기소했다.


14개월 넘게 재판이 계속되는 동안 멜런은 암 선고를 받았다. 여든 살의 멜런은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편지를 써서 국립 미술관을 지을 돈을 기부하고 자신의 컬렉션 전부를 기증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세무조사위원회는 기소를 취하했고 멜런은 다섯 달 뒤 세상을 떠났다. 멜런이 기부한 1500만달러의 기금과 컬렉션은 워싱턴에 국립미술관을 설립하는 토대가 되었다. 1941년 내셔널 갤러리 오브 아트가 문을 열었다. 판 에이크의 '수태고지'는 다시 한 번 자신을 소유한 국가를 빛내주는 보물로 전시되었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멜런의 제안을 받아들이면서 재판에 영향을 미치지는 않을 것이라고 단언했지만 과연 아무 영향이 없었을까. 멜런에게 우호적 사람들은 그가 전부터 국립미술관을 만들려고 마음먹고 있었고, 그림도 이를 위해 사 모았다고 하지만 과연 믿어도 좋을까. 혹자는 탄식한다. "한 나라가 어떻게 그런 위대한 예술작품을 팔 수 있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혹자는 대꾸한다. "인민을 위해서 다이아몬드를 트랙터로 바꾸는 것이 왜 안 된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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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혜의 그림으로 읽는 서양예술사]다이아몬드와 트랙터 이미혜 예술사 저술가 경성대 외래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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