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독서]철학으로 본 난민, 他者는 누구인가](https://cphoto.asiae.co.kr/listimglink/1/2018072610314884064_1532568705.jpg)
서구 철학사 태동기부터 현대사회까지 풍부한 지적 모험 탐구서
2002년 출간 이후 꾸준한 논평거리...철학자들 성과에 기대어 문제 고찰
[아시아경제 이종길 기자]"대한민국에서 난민은 우리의 이야기인 것 같다. 우리 사회는 늘 불평등하고 불합리했다. 상처가 치유되지도 못했다. 그래서 난민 문제가 커진 것 같다. 우리 사회가 가진 갈등들을 해결할 좋은 기회로 삼는다면 보다 성숙한 나라가 될 수 있다." 배우 정우성(45)은 난민으로 생긴 갈등이 우리 사회의 구조적 문제와 연계돼 있다고 지적했다. 약자와 소수자를 이해하는 문화가 정착되지 못했다는 역설. 하지만 그는 당당하게 밝힌 소신으로 대중에게 뭇매를 맞았다. 예맨 난민을 거부하는 국민청원은 1주일 만에 20만 명 이상의 동의를 얻었다. 가장 사람들을 자극하는 소재는 돈. 국민도 아닌 난민을 위해 세금을 쓰는 것이 불합리하다고 주장한다. 난민을 수용하면 일자리 경쟁이 심화될 수 있다는 의견도 많다.
문화와 생태의 조건을 넘어서 우리에게는 한 가지 근본적인 질문이 제기된다. '타자(他者)는 누구인가?' 프랑스의 철학자 에마뉘엘 레비나스가 '전체성과 무한'에서 절박하게 제기하고 마주한 질문이다. 타자와의 조우를 성찰하는 책에서 그는 총체성의 닫힌 질서 속에 무한함으로서 난입하는 도덕적 요구에 관한 매우 복잡한 문제를 제기한다. 내가 마주하는 타자는 누구인가? 또 다른 나인가? 레비나스는 "그렇지 않다"고 한다. 타자를 또 다른 나라고 말하는 것은 나에서 출발해 그를 이해하는 것이며, 나의 고유한 주관성으로 그를 추론하는 것이다. 이것은 현상학적 접근이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드러낸다.
현상학적 접근에 따르면 타자의 자리는 '타자 앞의 존재'로서 주체의 구조 자체 안에 마련돼 있다. 레비나스는 설명한다. "타자의 타자성은 그를 나와 구별 짓는 이런저런 특성에 달려 있는 게 아니다. 이런 방식의 구별은 유(類)의 공동체가 이미 타자성을 무화시킨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타자는 처음부터 이원적인 구조에 함축된 하나의 가능성이 아니다. 이는 나 역시 타자에서 비롯된다는 말이 되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인류학자이자 철학자인 마르셀 에나프는 저서 '진리의 가격'에서 "우리는 나에게서도 너에게서도 유래하지 않았다. 타자는 언제나 돌발한다. 타자는 순수한 사건이다"라고 썼다. "그는 언제나 다른 곳에서, 예기치 않게, 불시에 온다. 어쩌다 보니 그런 것이 아니라 당연히 그렇게 된다. 절대적인 새로움, 그것이 타자이다. 나에 관한 한 타자는 언제나 근본부터 다르다. 그래서 타자는 무한을 나타낸다. 타자는 어떠한 임의의 존재론적 상황으로부터 연역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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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의 가격은 서구 철학사 태동기의 고전적인 질문에서 시작해 풍부한 지적 모험을 거쳐 현대 사회에 필요한 대안을 마련하는 탐구서다. 2002년 프랑스에서 출판돼 수많은 논평의 대상이 됐고, 15년이 지난 지금도 각계에서 꾸준히 읽힌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관대함, 명예, 기부, 호의 등과 같은 오래된 비자본주의적 논리가 점점 더 힘을 얻고 있는 한편 다양한 사회 속에서 합리적인 계약 관계만으로는 풀 수 없는 새로운 도전들이 등장하기 때문일 것이다. 에나프는 기라성과 같은 철학자들의 성과에 기대어 문제들을 고찰한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게오르크 지멜, 브로니슬라브 말리노프스키, 마르셀 모스, 클로드 레비 스트로스, 칼 폴라니, 에드워드 에번스 프리처드, 모리스 고들리에, 마셜 살린스 등. 그는 서문에서 "의례적 증여와 공적 인정 과정에 대한 반복되는 논쟁들로 정치체제가 있는 사회의 기초, 법의 형태, 그리고 폭력에 대해 사유할 수 있었다"고 썼다.
에나프는 타자와의 관계가 어떻게 가능하다고 생각할까. 그는 타자가 우연히 도래한다는 점에 주목한다. "타자가 도래하는 것은 타자의 타자성이 나의 주관성의 동일성 안에 주어져 있지 않기 때문"이라고 썼다. 레비나스에 따르면 우연한 만남에 의한 타자의 도래는 인간의 얼굴로 설명할 수 있다. "표정은 일부가 되기를 거부하고 그대로 존재한다. 그런 의미에서 표정은 파악될 수 없고 망라될 수 없다." 여기서 표정은 총체성에 저항하며 무한함을 드러낸다. "무한함의 관념, 즉 작을수록 무한히 더 많은 것이 들어있다는 생각은 표정과의 관계라는 형식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그리고 무한함의 관념만이 이러한 관계에도 불구하고 동일자에 대하여 타자의 외재성을 유지하게 한다." 타자의 얼굴은 자신의 환원 불가능한 타자성을 드러낸다. 이 때문에 얼굴은 내가 아님을 보인다. 자유로우며, 내가 끼치는 영향에 저항한다. 이 저항이 곧 타자를 구성한다. 저항이 아닌 저항이자 윤리적인 저항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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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자성은 자유에서 오지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레비나스도 "타자성은 타자의 초월성을 설명하는 자유가 아니라, 자유를 설명하는 타자의 초월성이다. 나에 대한 타자의 무한한 초월성은 그에 대한 나의 초월성과 같은 의미가 아니다"라고 했다. 에나프는 이를 다음과 같이 풀이했다. "내가 스스로에게 인정하는 자유는 내가 나 자신을 위한 입법자가 될 자유가 아니라, 타자의 얼굴이 내게 내리는 명령에 답할 자유이다. 타자와의 조우 속에서 태어나는 윤리적 의무, 표정의 무한성이 증언하는 무조건적인 의무는 '너는 해야 한다'는 식의 형식적 의무가 아니라, 주어야 할 의무, 또는 나 자신을 주어야 할 의무이다. 타자의 출현 자체로 나는 채무자가 된다. 타자가 나에게 무조건적인 인정을 요구하는 만큼, 윤리적인 요구는 타자로부터 연원한다."
레비나스가 제기하는 것은 보편성의 문제일까? 어디서나 어떤 상황에서나 모든 인간 존재에게 주어져야 하는 인정이 문제일까? 그런 것이라면 국제법과 인권이 제도적인 해결책을 제시하고자 노력해왔다. 하지만 타자의 타자성 속에서의 인정, 정언명령으로서의 절대적 인정은 실정법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에나프는 "인정은 만남 자체 속에 그 대답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그것은 얼굴의 인정 속에서 일어난다. 거기서 시작되고, 거기에 처방이 있다. 이 개시적이고 암묵적이고 계속되는 인정이 없다면, 그것을 공고히 하고 국지적으로 공동체를 다시 발명하는 행동(선물ㆍ나눔ㆍ존중)은 가능하지 않다. 얼굴은 늘 보편성과 유일무이성의 대립을 넘어선다." 이종길 기자 leemean@
이종길 기자 leemea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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