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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제림의 행인일기 96]압구정동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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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제림의 행인일기 96]압구정동에서 윤제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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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여행에서 돌아오는 사람들의 태도는 크게 둘로 나뉩니다. 한 부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거나 손사래를 치며 단언합니다. “내가 여기 다시 오나봐라.” 다른 한 쪽은 그윽한 표정으로 꿈꾸듯이 말합니다. “언제 또 올 수 있을까.” 이상한 일입니다. 같은 나라의 출국소감이 어쩌면 이렇게 극과 극일까요.


‘관점’의 문제입니다. 구청이나 백화점 문화센터에서 같은 강의를 들은 두 수강생의 상반된 평가에 견줄 수도 있습니다. “괜히 돈만 버렸어. 재미도 없고, 배울 것도 없는데.” 어떤 교실이든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듯이, 반대 의견도 꼭 있게 마련입니다.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준 강의였어. 기회가 되면 다시 듣고 싶어.”

경구(警句) 하나가 불쑥 떠오릅니다. “여행은 가장 좋은 스승이다. 그런데 수업료가 너무 비싸다.” 저는 아직 이보다 멋진 ‘여행의 정의’를 듣지 못했습니다. 직접 보고 듣고 느끼고… 100% 실습이니, 수업료가 비쌀 수밖에요. 그러나 저는, 이것 역시 학생에 따라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마음으로 여행이란 학교에 들어가느냐의 문제지요. 구경꾼으로 떠나는 사람과 출발에 앞서 여행의 충실한 제자가 될 것을 다짐하는 사람. 시작하는 마음이 다른데, 배움과 깨달음의 결과가 어찌 같겠습니까. ‘돈만 버렸다’는 후회의 원천은 여행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여행자 자신에게 있습니다.

책에도 적용됩니다. 저는 가끔 학생들에게 이런 질문을 합니다. “세상에서 제일 싼 물건이 무얼까요?” 다양한 의견들이 나오지만, 제가 원하는 단어는 쉽게 나오지 않습니다. 당연합니다. 저 혼자서 옳다고 믿는 답이니까요. 고백하건대, 이 문답은 선생만 재미있고 즐거운 것인지도 모릅니다. 멋쩍으니 목소리만 높입니다.


“생각들 해보십시오. 어떤 책은 지은이가 몇 년을 연구노력해서 얻은 결과물일 것입니다. 어떤 저자는 평생을 바쳐 찾은 인생의 지혜를 엮었을 것입니다. 목숨을 건 투쟁의 성과도 있겠지요. 피땀의 결실을 만원에 팔고, 만 오천 원에 팝니다. 얼마나 헐값입니까. 한 인간이 생각한 전부, 한 생애가 이룩한 모든 것을 갖는데.”

[윤제림의 행인일기 96]압구정동에서


급기야, 한 세상이 신기루처럼 일어났다 스러집니다. ‘서점은 백화점 일층에 있어야겠다. 상상만으로도 아름답지 않은가. 보석 코너와 화장품 매장 사이로 책방이 보이는 풍경. 소설책 한권이 향수나 브로치보다 고급의 쇼핑 대상이 되는 사회. 천만 원짜리 시집 한권을 훔치다 붙잡힌 문학청년 얘기가 톱뉴스가 되는 나라.’


제 얘기는 그렇게 흘러서 여행 예찬이 됩니다. “책만 책이 아닙니다. 영화, 건축, 그림, 조각, 음악, 스포츠…. 책 아닌 것이 없습니다. 지구는 어마어마한 두께의 책입니다. ‘미국 어디까지 가봤니?’라는 질문은 ‘미국’이란 책을 몇 쪽이나 읽어봤냐는 물음이지요. 젊은 날엔 여행을 많이 하십시오.”


이런 잔소리 끝엔 으레 받게 되는 질문이 있습니다. “추천하고 싶은 여행지가 있으신지요?” 필독도서 목록 확인처럼 진지한 물음일 때, 저는 ‘인도(印度)’를 이야기합니다. 워낙 큰 책이라서 ‘축약본(縮約本)’ 한 권을 소개합니다. 가장 인도다운 곳입니다. ‘바라나시(Varanasi).’


제 기행수첩에는 이런 문장으로 남아있는 곳입니다. ‘이 도시와 친해진다는 것은 냄새와 소음과 먼지에 익숙해지는 것이다.’ 인간의 풍경과 삶의 리얼리티만으로 도시의 등급을 매긴다면, 뉴욕도 바라나시에 절해야 할 것입니다. 바라나시는 온몸으로 기억되고, 오감(五感)으로 기록되는 곳입니다.


갠지스(Ganges)강은 이 도시의 다른 이름인지도 모릅니다. 인도사람들이 어머니의 품으로 받들어 모시는 성스러운 물줄기지요. 두 번 가봤을 뿐인데, 툭하면 눈에 밟힙니다. 마침 인도 국민배우(아딜 후세인)가 그 강(영화 ‘바라나시’)을 들고 왔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하도 반가워서 압구정동까지 단숨에 달려왔습니다.


겨우 찾아낸 상영관입니다. ‘바라나시’를 만났습니다. 상영시각은 밤 아홉 시 이십 분. 관객을 세어보니, 저까지 일곱 명. 그립던 소식을 듣는데, 아무려면 어떻습니까. 생로병사가 평등한 갠지스강변에 앉아, 길 떠나는 아버지와 멀리 배웅 나온 아들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두루 알다시피, 이 나라 사람들 대부분은 여기서 삶을 마감하는 것이 소원이지요. 원제(原題)가 그런 로망을 품고 있었습니다. ‘호텔 샐베이션’(Hotel Salvation). ‘구원(救援)’ 혹은 ‘열반(涅槃)호텔’(?). 물론, 말이 호텔이지요. ‘피안(彼岸)행’ 여객터미널 대합실이라 해도 좋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둡고 무겁지만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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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를 마시며 웃고 떠듭니다. 서로 사귀고, 모여서 TV를 봅니다. 안녕과 평화의 인사가 오가고, 사랑과 배려가 빛나는 곳입니다. 위대한 건축가 ‘르 코르뷔지에’(Le Corbusier)의 말이 생각납니다. “죽음은 출구(出口). 여길 찾아 일생을 헤맨다.”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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