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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제림의 행인일기 95]대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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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제림의 행인일기 95]대구에서 윤제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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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자옥(丁子屋)화랑'을 아십니까? 1940년, 수화(樹話) 김환기(金煥基)의 개인전이 열렸던 곳입니다. 그의 연보를 보다가, 거기가 어디였는지 궁금해졌습니다. 별의별 추측을 다했지요. 주인의 성명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인터넷을 뒤지니 '정자옥(丁字屋)'으로 나오기도 해서, 한옥 '갤러리'라고 단정하기도 했습니다.


한옥이 흔하던 시절이었으니, 지붕이 '정(丁)'자 모양으로 생긴 집일 수도 있었겠다고 짐작했습니다. 요즘 삼청동이나 서촌 쪽에도 그런 집들이 더러 있지 않던가요. 옛집을 이용한 카페나 화랑. 해방 전 서울에도 그렇게, '모던'한 쓰임새를 지닌 전통가옥이 있었구나 싶어서 신기했습니다. 상상은 더 큰 날개를 달았습니다.

툇마루에 걸터앉았던 화가가 벌떡 일어나며 반가이 두 팔을 벌립니다. 식민지 청년 같지 않게 훤칠하고 당당한 모습으로, 작품을 설명합니다. 모란꽃 주변으로 알만한 얼굴들도 여럿 보입니다. 당대의 문인, 논객들입니다. 두어해 전, '이쾌대(李快大) 전' 사진자료(방명록)에서도 보았던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추측은 보기 좋게 빗나갔습니다. 근대건축유산에 대한 무지도 함께 드러났습니다. '정자옥'은 사람 이름도 아니고, 건물 생김새에서 나온 명칭도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조지야'로 읽히는 일본말이었습니다. '고바야시(小林)'라는 집안이 포목장사와 양복점 사업으로 일으켜 세운 백화점입니다.

'미스코시(三越)'와 함께 명동과 충무로 상권을 지배하던 이름이었습니다. 두 건물 모두, 아직 제자리를 지킵니다. 외양은 변했으나, 건물의 역할은 변치 않았습니다. 하나는 'S백화점', 또 하나는 '중앙백화점-미도파백화점'을 거쳐 오늘의 'Y플라자'가 되었지요. 그러니까, '조지야' 화랑은 백화점 미술관입니다.


문득, 제 청년기에 보았던 그림들이 줄지어 떠오릅니다. 남관, 이중섭, 장욱진, 유영국, 이응로, 천경자, 박고석, 서세옥, 박노수, 김기창... 그런 이들 작품을 처음 보던 날의 기억이 생생합니다. 첫 대면은 대개 백화점에서였습니다. 말하자면, 우리 현대미술에 대한 저의 학습은 대부분 적산가옥(敵産家屋)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윤제림의 행인일기 95]대구에서

돌이켜보면, 한 시절의 백화점 화랑은 무척이나 매력적인 교실이었습니다. 가난한 대학생들에겐 더 없이 황홀한 강의실이었습니다. 포마드나 화장품냄새가 나는 이들 곁에서, 생경한 미술용어를 듣는 것부터가 퍽 근사한 수업이었습니다. FM라디오의 클래식 선율을 들으며, 별세계와 만나는 시간이었습니다.


오늘 저는 오랜만에, 젊은 가슴을 쿵쾅거리게 하던 그림들과 다시 만났습니다. '매화와 항아리'를 만나고 '산과 달(山月)'을 만났습니다.' 친구(김광섭)의 시구(詩句)를 모티프로, 사무치게 그리워하던 이름들을 붓끝으로 불러낸 그림들입니다.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점점이 영혼의 별들입니다. 인연의 모래알들입니다.


가슴이 벅차오릅니다. 아침 일찍 서둘러 대구행 열차를 탄 제가, 대견스럽습니다. 이런 대규모 전시회가 어찌하여, 서울이 아니라 여기에서 열리게 되었는지는 따지고 싶지 않습니다. 칠곡군청 마당에서 열리면 어떠랴 싶습니다. 아니, 신안 앞바다 섬마을이면 또 어떻겠습니까.


실업률을 줄이고 청춘의 활력을 높이려 할 때, 이런 생각을 해보는 것은 어떨는지요. "부산행이나 목포행 열차의 한 칸쯤은 젊은이들을 위해 무료로 운영해봅시다. 미션은 분명히 주어야겠지요. 그 전시회에 가서, 김환기를 만나고 오라. 그의 그림 '산과 달'을 보고, 달이 산 위로 얼굴을 내미는 풍경도 직접 보고 오라."


철없는 몽상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가 젊은이들에게 가르쳐야 할 것이 빵 굽는 법이나 컴퓨터 기술처럼 실용적인 일만은 아닐 것입니다. 인간을 사랑하고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이 생각보다 많음을 일러주었으면 합니다. 미술과 음악과 문학의 끝없는 경계를 확인하고 오게 했으면 좋겠습니다.


젊음의 동력을 키우는 방법 하나가 상상력을 키우는 것임을 부인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미술관은 이상적인 학교입니다. 김환기 선생에게는 '개별적 존재'를 '보편'으로, '특수'를 '전체'로 확대시켜가는 미의식('이경성(李慶成)'의 작가론 참조)을 배울 수 있을 것입니다.


대구미술관에서 생각합니다. 문화와 청춘의 접점을 어떻게 더 늘려갈 것인가를 고민해야할 때입니다. 젊은이들로 하여금, 그림을 보는 것이 얼마나 위대한 수업인지를 경험케 했으면 좋겠습니다. 미술관엔 작가의 체취가 있습니다. 이 전시장에는 동경과 파리와 뉴욕을 돌아온 김환기, 영혼의 '아우라(aura)'가 실물로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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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맥베스'에 셰익스피어는 나오지 않습니다. '노인과 바다'를 펼쳐도, 소설가 헤밍웨이를 만나진 못합니다. 그러나 화가는, 죽어서도 관객과 '일대 일'로 만납니다. 지금 제 가슴은, '정자옥' 아니 '조지야화랑'에서 김환기를 만나고 있는 신의주 청년처럼 설렙니다.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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