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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한 詩]아름답다는 거/오봉옥

시계아이콘읽는 시간36초

어딘들 아름답지 않으랴만


바다에 종아리를 가만히 적시고 있는
샌프란시스코는 참 이쁘더라
바다 한가운데 떠 있는 알카트라즈 감옥조차
떠오르는 해를 와락 끌어안고 있으니
눈물 나게 이쁘기만 하더라

수십억 년의 시간이 빚어낸 흔적을 보여 주는
그랜드캐니언 협곡도 놀랍더라
오늘도 그 가랑이 사이로 바람을 끌어모으며
또 하나의 무늬를 새기고 있으니
입이 쩍 벌어지더라


그러나 정말 아름다운 건 흑인의 손
종이컵을 들고 커피를 홀짝거리며 걷던 노인이
길거리에 게워 놓은 토사물을 보더니 주저 없이 앉아
그 까맣고 긴 손가락으로 종이컵에 쓸어 모아서는
휴지통에 버리고 유유히 지나가더라

저게 뭐지?
집에 가서는 손녀의 머리카락이나 쓸어 넘겨 줄
그 까만 손가락이 그렇게 빛이 날 수 있다니!
이 세상 어떤 아름다운 풍경도
그것을 대체할 순 없을 것만 같더라


[오후 한 詩]아름답다는 거/오봉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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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적인 순간은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그리고 그 대상이나 경로에 따라 다르겠지만 대부분은 의아함과 뒤섞인 놀라움에서 시작한다. 예컨대 이 시에 적힌 "저게 뭐지?"의 순간이 그렇다. 물론 시를 이루어 가는 동안 이 문장이 필요해서 썼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정말 시인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을 것이고 그리고 그때 시가 비롯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보라. 샌프란시스코, 알카트라즈 감옥, 그랜드캐니언 협곡 등 그야말로 기가 막힌 절경들을 앞에 두고 감탄하고 있는데 느닷없이 등장해 남의 토사물을 종이컵에 쓸어 모아 휴지통에 버리곤 "유유히" 지나가는 흑인을 말이다. 누군들 놀라지 않겠는가. 그 흑인에 대한 경탄이나 존경은 이후의 일이다. 사람 속에 이미 시가 깃들어 있다. 채상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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