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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제림의 행인일기 80]동검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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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제림의 행인일기 80]동검도에서 윤제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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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말고는 아무도 없는 영화관에서, 혼자 앉아 있던 적이 있습니다. 월요일이었고, 열시쯤이었을 것입니다. 판소리 꿈나무들을 소재로 한 다큐멘터리를 보러 갔었지요. 신촌 어느 대학 캠퍼스 안 예술 영화관이었습니다. 영화가 시작될 때까지, 내내 불안했습니다. 막차에 홀로 남은 승객처럼 공연히 미안한 생각도 들었습니다.


이런 방송이 흘러나올 것만 같았습니다. “입장하신 손님께 송구스런 안내말씀을 드려야겠습니다. 객석이 너무 많이 비어서, 이번 ‘타임’은 부득이 쉬어야 할 것 같습니다. 다음 기회를 이용해주십시오. 환불해드릴 테니 매표소 앞으로 나오시기 바랍니다. 어려운 걸음을 하셨을 텐데, 죄송합니다. 거듭 사과드립니다.”

그러나, 그런 방송은 나오지 않았습니다. 영화는 제 시간에 시작되었고, 저는 황제처럼 영화를 보았습니다. 앞좌석에 다리를 올리고, 길게 눕고 싶은 충동까지 일어나더군요.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 마치, 극장이 저 한사람을 위해 스크린을 비워둔 것 같았습니다. 군소리 없이 영화를 돌려준 직원에게도 감사하고 싶었습니다.


도심 한복판도 아닌 곳, 회사 가고 학교 가야 할 시간에 맞춰진 영화. 그 일방적인 시간과 장소의 폭력성에도 불구하고, 제 기분은 나쁘지 않았습니다. ‘혼자’ 들어간 식당이나 술집에서보다 더 귀한 대접을 받은 느낌이었습니다. 극장 주인의 친구나 친척처럼, 공짜로 영화 구경을 한 것 같았다고 할까요.

오늘 저는 또, 그런 호강을 했습니다. 특별시사회에 초대된 손님처럼, 어깨가 으쓱해졌습니다. 영화감독인 주인이 내려준 커피를 마시며, 그의 피아노 연주를 들었습니다. ‘기차는 여덟 시에 떠나네.’ 그는 인사말도 몸가짐도 깍듯했습니다. 관객들에게 최대한의 예의를 보여주려는 사람의 태도였습니다.


그저 나들이 삼아 건너온 강화도 여행길에서, 생각지도 못한 횡재가 참 많았습니다. 바람은 아직 매서운데, 햇살은 외할머니 손길처럼 따스하고 보드라웠습니다. 이맘때면 이 섬은 ‘유빙(流氷)’의 계절. 한강, 임진강을 타고 내려온 얼음덩이들이 서해와 만나서 일대장관을 이루는 광경을 목격했습니다. 대단한 ‘스펙터클’이었지요.

[윤제림의 행인일기 80]동검도에서 그림=최길수 화백


대조적으로, 이 꼬마 섬의 ‘미니 영화관’ 앞은 숨 막히게 고요한 정지화면입니다. 갈대밭 너머 바다, 그리고 꽃봉오리 같은 섬. ‘이 섬 전체가 극장이로군.’ 그런 생각으로 영화를 기다렸습니다. 이윽고 영화가 시작되는 순간,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 했습니다. 첫 장면이, 극장 앞 풍경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 같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천국에 있는 것처럼’(As it is in heaven)이란 스웨덴 영화였지요. 스산한 갈대밭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소년의 애잔한 표정이 이 음악영화의 미학을 요약하고 있었습니다.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산길, 아름다운 침엽수림과 시리도록 처연한 바다. 어떤 ‘마에스트로(maestro)’가 대자연의 완벽주의를 넘어서겠습니까.


겨울해가 기울기 시작하는 해안이 눈 덮인 논두렁길을 닮았습니다. 검은 갯벌 위에 희끗희끗한 눈과 얼음의 결정에서 소금사막을 연상할 수도 있습니다. 붉은 석양빛이 고려청자의 ‘상감(象嵌)’기법으로 바다를 수놓고 있습니다. 아주 오래된 풍경일 테지요. 강화도는 몸뚱이만으로도 ‘보물섬’입니다.


역사를 불러오면 ‘이야기 보물창고’가 되지요. 영화관이 들어앉은 섬, ‘동검도(東檢島)’는 소설이나 시나리오 제목이 되어도 좋을 곳입니다. 이곳을 지나는 배와 사람들을 검문하고 조사하던 곳이라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지요. 행인의 면면(面面)과 사연만 챙겨도, 드라마 극본 하나쯤은 하룻밤에 꿰어질 것 같은 착각이 일어납니다.


동검도는 삼남(三南)에서 한양으로 오르던 고깃배와 세곡선(稅穀船)의 주요 통로였습니다. 중국을 오가던 상선과 사신들을 태운 선박을 관리 감독하기도 했겠지요. 요즘으로 치자면 세관(稅關) 역할을 했을 수도 있습니다. 강화가 어디 보통 섬입니까. 한 시절, 이 땅의 서울 노릇까지 했던 곳 아닙니까.


고려 왕조의 피난살이가 생각보다 궁핍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추론에도, 쉽게 고개를 끄덕이게 됩니다. 바닷길로 세금도 잘 들어오고, 부안이나 강진에서 청자를 싣고 오는 배도 약속을 잘 지켰을 것입니다. 그 덕에 춤과 음악과 잔치는 계속될 수 있었고, ‘팔만대장경’ 주조(鑄造) 같은 국책사업도 어렵지 않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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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그 빛나는 문화예술의 시기를 이 섬이 야무지게 증언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생각이 여기에 이르니, 이 미니 영화관이 지극히 자연스럽고 무궁무진한 상상력의 초소(哨所)처럼 여겨집니다. 이규보의 시와 청자의 무늬, 그리고 화문석(花紋席)의 디자인이 눈앞에 어룽거립니다.


섬 속의 섬, 동검도는 스크린의 민주주의까지 가르쳐줍니다. 천만 관객의 영화 한편보다, 관객 천 명의 영화 백 편을 생각해보길 권합니다. 마침 장엄한 일몰의 시간입니다. 관객 숫자를 묻지 않는 라스트 ‘씬’(scene)입니다.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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