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이현우 기자]마르틴 루터(Martin Luther)의 종교개혁의 뇌관이라 할 수 있는 것은 뭐니뭐니해도 '면죄부(Indulgentia)'란 독특한 상품이다. 당시 면죄부는 단순히 교회의 타락성만을 상징하는 문제를 벗어나 교회와 황제, 제후 등 전체 독일의 지배세력들이 복잡하게 얽혀있는 정치자금줄로서 기능했던 다단계 상품이었다.
원래 면죄부를 지칭하는 용어인 '인둘겐치아(Indulgentia)'는 부정적 의미로 사용되던 용어가 아니었다. 교황청에서 쓰는 공식적 용어는 '대사(大赦)'라고 번역되며 원래는 이교도와의 전쟁에서 사람을 죽인 병사들, 갖가지 권모술수를 행했던 정치인이나 국왕들에게 교회 증축이나 건설 비용을 받고 대신 속죄기간을 단축해주는 형태로 운영됐다. 11세기 경부터 시작된 대사령 발행은 16세기까지는 제한적으로만 발행됐을 뿐이었다.
그러나 16세기로 들어서면서 교황청은 급전이 필요하게 됐다. 1500년대 초부터 성 베드로 대성당 축조란 역대급 규모의 대형 공사와 함께 교황령 내 전쟁비용 등으로 어마어마한 자금이 들어갔기 때문이다. 이 급전 마련을 위해 교황청은 기존 면죄부의 판매와 발행을 늘리고, 성직도 매매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시간이 지나면서 성직매매 대금을 먼저받고 대신 해당 성직자에게 면죄부 판권을 주는 거래가 빈번하게 발생했다. 판권을 받은 성직자는 교황청이 지정한 기간동안 자신의 영지 내에서 면죄부를 팔 수 있는 권리를 부여받았다. 면죄부 다단계 판매업의 시작이다.
특히 당시 독일의 주요 교구장직은 그 지역의 종교적 지도자임과 동시에 정치적 지배자를 겸했기 때문에 대단히 큰 이권이 걸린 자리였다. 지역 주교들은 제후들 중에 선거로 선출되는 신성로마제국 황제 선거에도 개입할 수 있었기에 독일 전체 정치지형에 큰 영향을 끼쳤다. 교회와 정치, 자본이 결합된 기묘한 중세 독일의 정치구조가 면죄부 판매를 더욱 부추긴 것. 이에 주교직을 사고자 빚을 지는 성직자들이 줄을 이었고, 이렇게 빚으로 성직을 산 주교들이 자신의 통치지역에 면죄부를 판매하는 행태가 빈번이 일어났다.
루터의 종교개혁과 직접적으로 맞물린 사건은 1514년, 독일 중부의 노른자위 땅이라 불리던 마인츠 대주교 자리가 매매된 일이었다. 당시 마인츠 대주교직을 산 알브레히트(Albert) 주교는 당시 독일의 유명 금융가문인 푸거(Fugger) 가문에게 작은 나라 전체 예산과 맞먹는 2만9000두카트란 거금을 빌렸다. 이 빚을 갚고자 알브레히트 대주교는 교황청에 면죄부 판매비용의 절반은 빚을 갚고, 절반은 교황청에 상납하겠다고 밝혔고, 교황청은 그에게 8년간 그의 영지 내에서 면죄부를 판매할 판권을 줬다.
교황청으로부터 판권을 받은 알브레히트는 도미니크 수도회 수사로 이름만 걸고 있던, 실상 전문 면죄부 다단계 판매상이었던 요한 테첼(Johann Tetzel)이란 인물을 영입했다. 그는 경력 10년의 면죄부 판매자로 악명을 떨쳤던 인물이었으며 브란덴부르크에서 유명한 판매꾼이었다. 그는 알브레히트를 대신해 면죄부 사업을 대행했으며 마인츠는 물론 독일 전역으로 사업을 확장해나갔다.
테첼의 판촉은 당시는 물론 지금봐도 가관일 정도로 기막힌 문구들 뿐이었다. 그는 "성모 마리아를 강간해도 면죄부만 사면 깨끗이 벌을 용서받을 수 있다"던가 "현세의 자손들이 낸 동전이 헌금함에 '쨍그랑' 소리가 나는 순간 조상의 영혼이 연옥에서 천국으로 직행한다"며 판촉에 나섰으며 가는 곳마다 수도자들의 반발이 일어났다. 이후 그의 영업망이 작센지역까지 번졌을 때, 루터가 나서게 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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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터의 95개조 반박문이 처음 나왔을 때만 해도 교황청은 사태의 심각성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오히려 당시 교황 레오10세는 온갖 사치와 전시성 행정으로 80만두카트란 어마어마한 채무에 시달려 파산직전에 몰려있었다. 더구나 새로운 신성로마제국 황제 선거를 앞두고 교황이 밀고 있던 작센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와 프랑스의 프랑수아 1세, 합스부르크 가문의 카를5세 등 쟁쟁한 후보들이 선거전을 치르고 있어 교황은 더 많은 돈이 필요했다. 한번에 31명의 추기경을 돈받고 임명할 정도로 여전히 정신을 못차리고 있었다.
루터도 95개조 반박문이 그렇게 큰 파장을 몰고 왔을지는 몰랐으나 당시 발전된 인쇄술을 타고 그의 반박문은 14일만에 독일 전역과 스위스 일대까지 퍼져나갔다. 교회와 황제가 얽힌 이 다단계 장사속에 분노하고 있던 독일인들은 물론 전 유럽이 들끓기 시작했다. 종교개혁이 시작된 것이다.
이현우 기자 knos84@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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