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고 오래되면서 편안해지는 것들
흰 칫솔 같은 거
품이 늘어난 뜨개옷 같은 거
부드럽고 순해진
그런 것을 버려야 할 때
조금 흐릿하다 싶더니
깜박임도 없이 나가 버린
전등 같은 것을
운전면허 갱신을 위해
새로 찍은 증명사진 속
늙은 아버지의 옛날 면허증의
그보다 더 젊은 아버지를
교체해야 할 때
나는 흔들렸는가
어지러웠나
당신이 할 수 있다며
의자를 디디려는 아버지를
뿌리치고 내가 올라설 때
사진기 섬광처럼
한 번 두 번 점멸하는 빛에
눈이 부셔 어수룩한 초상이 되었다가
이윽고 서두름 없이 환해진 허공이
사로잡힌 시간으로 바뀌는 동안
차마 자리를 비키지 못한 아버지가
옆에서 의자를 짚어 주고 있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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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나보다 젊은 아버지는 힘이 셌다. 아버지는 일요일 아침이면 공구 통을 들고 집 안 여기저기에 못을 박거나 톱질을 했다. 아버지는 힘이 세서 밥공기도 컸고 숟가락도 컸다. 힘이 센 아버지는 여름이면 그물을 펼쳐 피라미와 붕어를 잡아 주었고 가을이면 떡메로 밤과 도토리를 털어 주었다. 아버지 자전거도 아버지만큼 힘이 세서 아버지가 한번 페달을 구르면 도저히 따라갈 수가 없었다. 그렇게 방죽을 넘어 동산을 넘어 힘이 센 젊은 아버지는 자꾸자꾸 사라져 갔다. 이제는 힘이 센 아버지는 어디에도 없고 대신 드문드문 이 빠진 늙은 아버지가 녹슨 대문 앞에서 말갛게 웃고 있다. 채상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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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한 詩]형광등을 갈 때/채길우](https://cphoto.asiae.co.kr/listimglink/1/2017101113492525596_1.jpg)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