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과 시간 사이 틈, 그 간극 찾아가는 여행
[아시아경제 구채은 기자] ①강원도 봉평 메밀밭 / 허생원과 성서방 처녀,
②전라남도 보성군 벌교 / 인텔리 김범우와 주도면밀한 염상진
③서울 미아리의 판자촌 / 성금어매와 똥지게꾼
④학이 날아드는 선학동 / 한(恨) 많은 소리꾼 부녀
소설 속 공간과 등장인물을 짝지어봤다. ①이효석, '메밀꽃 필 무렵' ②조정래 '태백산맥' ③김소진, '장석조네 사람들' ④이청준, '선학동 나그네'다. 소설의 공간은 인물을 잉태한다. 인물은 공간을 품는다. 벌교꼬막을 맛보면 걸쭉한 하대치의 전라도 사투리가 떠오른다. 강원도 봉평 메밀밭의 풍경만 봐도 성서방네 처녀가 묵었던 물레방앗간이 생각난다.
책 '소설, 여행이 되다'(전2권)는 한국 근현대소설이 묘사하는 명소를 찾아간다. 그 곳은 창작의 마르지 않는 샘이기도 하고, 우리나라 근ㆍ현대사의 땀과 피, 눈물이 묻어있기도 하다. 종탑 소리가 울리는 안동의 시골교회에서부터 강원도 봉평 메밀밭 물레방아간, 상주 두메산골, 전라남도 장흥 선학동, 서울 망원동 8평짜리 옥탑방, 영등포 삼오식당, 전라도 벌교까지 곳곳이 다채롭다. 그곳엔 몽실언니, 허생원과 성서방네 처녀, 천덕꾸러기 둘째아들 만수, 소리꾼 부녀, 만화가를 꿈꾸는 영준이, 억척스런 식당 아줌마, 무녀의 딸 소화가 발딛고 숨쉬며 살아간다.
풍경은 사진으로 담아낸다. 글로는 이야기와 소설가에 대해 풀어썼다. 서사가 공간과 만나는 지점을 에세이 형식으로 펴낸 '문학기행서'다. 소설가의 고향, 시대상, 지금에와서 달라진 모습도 꼼꼼히 썼다. 판자촌이 빼곡했던 미아리가 이제는 로봇다리 같은 아파트 단지로 변해버렸다. 문학을 읽고 싶게도 하고, 여행을 떠나고 싶게도 하는 책이다. 소설과 여행을 좋아하는 저자 아홉 명이 발로 뛰며 엮었다.
공간의 한자어는 빌 공(空) 사이 간(間)이다. '비어있는 사이ㆍ틈'이란 뜻이다. 공간은 점ㆍ선ㆍ면으로 이뤄져있고 상(上)하(下)좌(左)우(右)도 있다. 색깔과 형태, 냄새와 소리가 있다. 소설 속 공간도 마찬가지다. 이야기가 펼쳐지는 무대, 인물들이 살고 있는 일정한 장소는 핍진하게 묘사돼야 한다. 종이 위에 누워있는 활자가 몸을 일으켜세워 공간을 채색하는 순간이다. 그래야 '지어낸 이야기'가 아닌 '진짜같은 이야기'가 된다.
김소진의 장석조네 사람들의 한 대목을 보자. "시커먼 시궁창물이 해자(垓子)처럼 휘우듬하게 스쳐지나갔다. 가랑이를 벌려 훌쩍 건너뛰곤 했다. 그러다가 삐끗 걸음걸이가 어긋나면 긁어낸 펄흙을 질퍽하게 쌓아 개어놓은 곳에 신발 뒤꿈치가 박혀 낭패를 보는 경우도 없지 않았다. 잘 그을린 감자 껍질처럼 훌꺼덕 벗겨져버릴 듯이 엉성한 날림집이었다."
1970년대 서울 미아리 판자촌이 소설 속 공간이다. 이 곳에 날품팔이 둘남아범, 육손이형, 폐병쟁이 진씨, 택이 엄마, 쌍용아범이 부대끼며 산다. 소설가 김소진 자신이 '미아리 산동네는 여태껏 나를 지탱해온 기억, 그 기억을 지탱해온 육체'라고 했듯이 작가의 글쓰기로 빚어낸 미아리는 생동한다.
박성우는 프롤로그에서 공저자 아홉 사람을 대신해 "시간과 시간 사이의 '틈', 그 간극을 찾는 가장 좋은 방법은 여행"이라고 썼다. 계절과 계절 사이의 간절기처럼 시간과 시간 사이에도 겨를이 있는데 여행이 그 틈을 벌리고 채워준다는 것이다. 독서가 여행으로 여행이 독서로 종종 비유되는 이유다.
책을 덮고 나니 하고 싶은게 많아진다. 우선 선릉공원을 산책하며 정용준의 단편소설을 읽고 싶다. 양수리 물안개를 보러 새벽 일찍 주말여행을 나서고도 싶다. 무엇보다 '무진 Mujin 10km'라는 이정비를 찾으러 여행을 떠나고 싶다. 그리곤 '간단히 말하겠습니다. 사랑하고 있습니다'라고 쓴 쪽지를 누군가에게 보내고 싶다.
소설, 여행이 되다: 작가가 내게 말을 걸 때/1만3000원
소설, 여행이 되다: 작품이 내게 찾아올 때/1만5000원
이시목 외 8인 지음/글누림
구채은 기자 faktum@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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