붕어빵에 붕어 없고 칼국수에 칼 없듯이 영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2008년작)에는 노인이 없다. 은퇴를 앞둔 퇴물 보안관이 스크린에서 허우적댈 뿐. 그런데도 '없다'는 단정적인 어휘가 호기심을 유발한다. 왜 하필 '노인'인가. '노인을 위한 나라'는 어떤 사회인가. 삼강오륜? 장유유서? 경로우대?
각설하고, 영화는 세상사에 지친 보안관의 무기력증을 무미건조하게 그린다. 한때는 이름을 날렸(을지 모르)지만 지금은 퇴물 중의 퇴물. 그런 그가 살인마를 뒤쫓는데 성과가 있을 리 없다. 영화 말미 살인마는 황당하고 뜬금없이 붙잡히는데 역시나 퇴물은 이 과정에 전혀 기여하지 않는다. 그러고 보면 영화 제목의 '노인'은 중의적이다. 하루하루 맥 빠져가는 '퇴물'을 은유하면서도, 세상의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루저'를 의미한다는 점에서. 나이 들어 노인이 아니라 정신이 이미 피폐해진 인간.
영화와 달리 현실의 '노인'은 65세 이상 인구를 칭한다. 자격 시비가 있긴 하다. TV에서 맹활약하는 남진은 70세, 조용필은 67세다. 지금도 무대에 오르면 '깍~ 오빠!' 함성이 하늘을 찌른다. 헐리우드 거장 감독인 리들리 스콧이나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80대다. 이들에게 '노인' 두 글자는 당치도 않다. 그뿐인가. 요즘은 웬만한 시골 이장도 7,80대다. 그 바람에 환갑을 훌쩍 넘긴 청년회장이 이장의 막걸리 심부름을 하느라 눈썹을 휘날린다. 그러니 환갑 잔치가 웬 말인가, 인생은 70부터인데.
'노인' 기준을 65세에서 70세로 높이자고 한다. 고령화 사회에 마땅한 고민이다. 빠르게 늙어가는 나라에서 정해진 재원을 '좀더 나이 많은' 계층에 사용하자는 경제적인 이유가 배경이다. 기초연금ㆍ장기요양 보험ㆍ국민연금 지급, 지하철 무료 탑승, KTXㆍ항공ㆍ여객선 할인…. 노인의 기준을 70세로 높이면 3조원 가량을 아낄 수 있단다. '젊은 노인'인 65~69세가 양보할지는 모르겠지만.
그제 치러진 대통령 선거도 실은 '세대 대결'이었다. 50세 이하는 '1번'을 선택했지만 60세 이상은 '반(反)문'에 표를 던졌다. 나이를 먹으면서 보수화된다는 것은 수많은 선거를 통해 입증됐다. 주름이 늘수록 사람들은 자신이 이룬 것을 지키려 하고, 자기 삶에 만족하는 경향이 강해진다. 이른바 '연령 효과'다.
때론 무언가를 지키는 것이 변화시키는 것보다 값질 때가 있다. 보수의 가치도 진보만큼 소중한 법이다. 문제는 보수를 가장한 '색깔론', 보수를 위장한 '지역주의'라는 괴물이다. 아닌게 아니라, 거짓과 편견에 사로 잡혀 있으면 아무리 젊어도 '퇴물'에 불과하다. 세상을 올곧게 마주할 줄 알면 나이를 먹어도 '청춘'이다. '청춘을 위한 나라는 있다', 영화가 아니라 현실이고 싶다.
이정일 산업부장 jay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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