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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제림의 행인일기 41] 달빛장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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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제림의 행인일기 41] 달빛장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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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지자, 한강공원에 장이 섰습니다. 두리번대며, 기웃거리며 두어 바퀴를 돌았습니다. 이름부터 재미있습니다. '서울 밤도깨비 야시장-반포 낭만 달빛 마켓'. 푸드 트럭 수십 대가 광장의 울타리를 이루고, 가운데엔 갖가지 노점들이 빙 둘러앉았습니다. 저마다 직접 만든 물건을 들고 나와 파는데, 대개 수공예품들입니다.


음악에 맞춰 춤추는 무지개 분수, 황홀한 야경에 살랑거리는 봄바람. 또 하나의 강물로 넘실대는 젊음의 물결. 눈과 귀만 어지러운 게 아닙니다. 굽고, 찌고, 볶고, 삶고, 끓이고! 갖가지 냄새가 코를 간질입니다. 넓은 마당이 거대한 부엌입니다. 레스토랑입니다.

코너마다 장사진(長蛇陣)입니다. 음식 하나 사먹자면 인내력 테스트를 받아야 할 지경입니다. 참을성이 없으면 구경꾼으로 만족해야 합니다. 당연히 점포마다 즐거운 비명이지요. 만두, 핫도그, 스테이크, 감자튀김…. 어느 줄이 더 긴가 시합을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아무도 지루해하지 않습니다.


저는 비교적 짧은 줄을 선택했습니다. 떡을 파는 곳입니다. 인절미 예닐곱 개를 노릇하게 구워서 일일이 조청을 바르고 콩고물을 묻혀 줍니다. 연인들인지 신혼부부인지 잘은 모르겠으나, 주인 남녀는 지금 숨 돌릴 겨를이 없습니다. 찰진 솜씨로 한 사람은 굽고, 찰진 말씨로 한 사람은 팝니다.

아무려나 '고마운 일'입니다. 이렇게 흥겨운 '청춘의 굿판'을 마련해준 사람들이 고맙고, 맛의 신세계를 경험하게 해주는 젊은이들이 고맙습니다. 하나의 브랜드가 될 수도 있을 작품들을 자랑스레 선보이는 젊은 아티스트들이 고맙습니다. 땀을 흘리며 '불'과 '연기'와 씨름하는, 저마다의 '신념'을 파는 젊은 그들이 고맙습니다.


동시에, 미안한 생각도 고개를 드는군요. '저렇게 행복한 얼굴로 능력과 열정을 팔 수 있는 청춘들인데. 터가 없고 판이 없어서 젊음의 시간과 에너지를 놀리고 있는 젊은이들이 얼마나 많은가. 힘과 슬기는 넘치는데 쓸 곳이 없다는 것은 얼마나 딱한 일인가.'


'연부역강(年富力强)'. 시간 부자, 힘의 강자(强者)면 무엇 하겠습니까. 의자가 없고 멍석이 없는데, 시장이 없고 광장이 없는데, 극장이 없고 무대가 없는데. 말이 통하는 사람이 없는데, 눈높이를 맞춰줄 사람이 없는데. 무엇 때문에 목이 타는지, 슬픔의 근원이 무엇인지 관심 두는 이가 없는데.


청년실업은 통계전문가나 정치가들의 회의실에서 해결될 문제가 아닙니다. 20세기 작도법(作圖法)으로는 그들이 그리워하는 세상의 지도를 만들기 어렵지요. 그런데도 우리는 지금, 그들이 계속 우리처럼 살기를 주문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M1소총 교본으로 미래 전쟁의 전술을 가르치고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오늘 낮에 본 연극이 떠오릅니다. 아서 밀러의 '세일즈맨의 죽음'(Death of a Salesman). 1949년에 초연된 작품인데, 감동의 공감대는 여전합니다. 평생을 성실히 살아온 주인공 '윌리 로먼'은 이땅에도 있을 법한 어떤 아버지의 이름일 수도 있습니다. 더 이상의 '기회 없음'에 절망하며 자살로 삶을 마치는 가장이지요.


그러나 죽음의 진짜 이유는 그게 아니었습니다. 수입이 생길 때마다, 현관 계단을 만들고 지하실을 만들고, 욕실 하나 더 만드는 게 기쁨과 보람이었던 아버지. '시멘트 한 포대만 있으면 더할 나위 없이 행복'했던 아버지. 그렇게 가정적이었던 사람답게, 누가 물으면 '아들이 얼마나 잘 나가는지' 허풍을 치던 아버지.


아버지는 두 아들이 번듯하게, 남부럽지 않게 성공하기를 간절히 바랬습니다. 그러나 그 소망의 기준은 너무 오래된 것이었지요. 그가 지켜온 삶의 문법은 모범적일 뿐, 새로운 시대 질서와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끝없이 이어지던 부자간의 갈등은 아버지의 죽음으로 끝이 납니다. 그것은 모든 가치의 소멸이었습니다.


그는 두 아들, 비프와 해피가 자신의 보험금으로 희망을 찾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자식들도 아내 린다도 행복해지지 않았습니다. 큰 아들 비프의 대사가 의미심장합니다. 그가 좌절의 순간에 쏟아낸 말이지요. "왜 원하지도 않는 사람이 되려고 이 난리를 치고 있는 거야?"


[윤제림의 행인일기 41] 달빛장터에서 윤제림 시인

아버지 친구 찰리가 장례식장에서 하는 얘기도 귀담아 들어야합니다. "…세일즈맨은 반짝이는 구두를 신고 하늘에서 내려와 미소 짓는 사람이야. 사람들이 그 미소에 답하지 않으면, 그게 끝이지. (중략) 이 사람(윌리 로만)을 비난할 자는 아무도 없어. 세일즈맨은 꿈꾸는 사람이거든."


청년이야말로 꿈꾸는 세일즈맨입니다. 물론 아무 거나 팔진 않습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팝니다. 직접 만들어 팔 수 있는 물건도 많습니다. 그러나 아무 거나 만들진 않습니다. 원하는 것을 만듭니다. 원료와 재료, 노하우와 레시피, 아이디어도 충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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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족한 것은 달빛장터. 그리고 '반짝이는 구두를 신고 미소' 지을 때, '미소에 답'해줄 사람들.


윤제림 시인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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