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사람읽기]노숙 절망 이겨내는 한 권의 힘… 어느 '노숙인판매원'과 함께 한 영하의 지하철역
[아시아경제 부애리 기자, 윤형준 인턴기자]연말이 되면 사람 많은 지하철역, 번화가엔 어김없이 빨간색 구세군 냄비가 등장한다. 하지만 '자선' 냄비 말고 '자활' 빨간색 조끼도 있다. '빅판' 빅이슈 판매원들이다. 노숙인 생활을 끝내고, 당당하게 세상 밖으로 나온 이들이다.
"안녕하세요 빅이슈입니다" 27일 영하 2도의 매서운 날씨, 2년째 종각역에서 노숙인 자활잡지 빅이슈를 판매하고 있는 신영순(64)씨가 외쳤다. 월요일부터 일요일까지 하루도 빠짐 없이 자리를 지키는 신씨에게 쉬는 날은 비오는 날이 유일하다.
기자가 신씨의 곁에서 빅이슈를 들고 있은 지 40분쯤 지났을까. 몸이 저절로 흔들리고 손이 터질 듯한 추위가 몰려왔다. 지나가는 행인은 많았지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가끔 힐끔거리는 사람들도, 추운 날씨 탓인지 이내 고개를 돌리고 발걸음을 재촉했다. 신씨는 "손님은 멀리서부터 티가 난다. 웃으면서 빅이슈를 향해 다가온다"고 설명했다.
빅이슈는 영국에서 '비즈니스'를 통해 노숙자 문제를 해결하고자 시작한 잡지다. 노숙인에게 우선 '빅이슈' 10권을 무료로 제공하고, 노숙인들은 이 10권을 팔아 자본금(5만원)을 마련해 다시 책을 사고 판매해 수익을 얻는 구조다. 현재 한국에선 55명의 빅이슈 판매원들이 활동하고 있다.
길에서 장사를 하다가 사기를 당해 빚더미에 앉은 신씨는 2년 반 동안 노숙인 생활을 했다.
신씨는 "신용불량자가 되기 전에는 청소부도 하고 경비원도 할 수 있었지만, 신용이 안좋아지니 직업을 구하고 돈 버는 것이 불가능해졌다. 돈 없이 찾아가니 부모에게서도 문전박대를 당했다"며 노숙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밝혔다.
이어 신씨는 "강물에 뛰어든 적도 있다. 하지만 몇 시간만에 구조대가 와서 구해줬다. 이럴 생각으로 열심히 살라고 하더라"며 당시를 회상했다.
신씨는 영등포의 한 성당 무료급식소에서 빅이슈 코디네이터의 쪽지를 받고 빅이슈 판매원이 될 결심을 했다. 빅이슈코리아의 코디네이터들이 홍보 쪽지를 돌리면, 자활의지를 가진 노숙인들이 신청한다.
신씨는 "원래 종각역에서 팔던 판매원이 술을 마셔서 내가 이 자리로 오게됐다. 여기 있다보면 노숙인 시절 버릇을 끊지 못하고 모여서 술을 마시는 사람이 있다"고 전했다.
빅이슈 판매원은 술을 마시고 판매 금지, 흡연 중 판매 금지, 하루 수익의 50%는 저축하기 등의 판매수칙을 꼭 지켜야 한다. 만약 술을 마시고 빅이슈를 판매할 경우 판매자격이 3개월 간 정지된다.
'빅이슈'는 아는 사람은 알지만, 아직까지 모르는 사람이 더 많다. 실제로 트렌드모니터가 전국 19~59세 성인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빅이슈' 관련 설문조사를 한 결과, 빅이슈에 대해 아는 소비자가 4명 중 1명 뿐이었다.
기자가 판매가 저조하다고 걱정하자 신씨는 "안팔릴 때는 5시간 동안 1권도 안 팔릴 때도 있다. 오늘 안 팔리면, 내일 잘 팔리고 내일 안 팔리면 모레 팔릴 것이다"라며 미소지었다. 부모, 친구에게 외면당한 신씨는 사회의 불만과 사람에 대한 불신이 가득할만도 한데 시종일관 긍정적인 모습이었다.
힘든점이 없냐는 질문에 신씨는 "간혹 지나가는 사람들이 '거지새끼'라며 비아냥 거릴 때도 있고, 근처 노숙인들이 신씨를 찾아와 돈을 달라고 행패를 부리기도 한다"고 답했다. 이어 그는 "하지만 격려해 주는 사람들 덕에 힘이 난다"며 "수원에서 찾아오는 손님이 있다. 한 번에 6~8권씩 사서 지인들에게 선물하는 독자도 있다. 또 따뜻한 말을 들을 때면 마음이 뿌듯해지고 손님들에게 배우는 점이 많다"고 말했다.
신씨는 건강이 허락할 때까지 빅이슈를 판매할 생각이다라고 밝혔다. 고시원에서 생활하고 있는 신씨는 '빅판'으로 돈을 더 모아 임대주택에 들어가는 것이 목표라며 환하게 웃었다.
빅이슈코리아에 따르면 2010년부터 현재까지 총 800여명의 노숙인들이 빅이슈를 거쳤고, 이들 중 20여명은 재취업에 성공했으며, 66명은 임대주택에 입주했다. 새 삶을 꿈꾸며 현재 빅이슈코리아에 이름을 등록한 빅판은 56명이다.
부애리 기자 aeri345@asiae.co.kr
윤형준 인턴기자 hy1232@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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