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그사람]매국노 처단에 나선 독립운동가 "2000만 동포가 공범"…현 정치계의 비슷한 이름과 헷갈리지 마세요
이재명은 명동성당 앞에서 군밤장수로 변장하고 있었다. 오전 11시께 이완용이 성당에서 나오자 그는 칼을 들고 달려들었다. 막는 사람이 있었지만 한 번에 제압하고 이완용의 허리를 찔렀고 도망가려하자 어깨 등을 다시 찔렀다. 이완용이 죽었다고 생각한 그는 만세를 부르고 지나가는 사람에게 담배를 빌려 피웠다.
107년 전 오늘인 1909년 12월22일의 일이다. 스물세 살의 청년 이재명이 을사오적 중의 하나인 당시 총리대신 이완용을 처단하기 위해 나선 것이었다. 하지만 이완용은 중상을 입었지만 살아났고 이재명의 의거는 실패로 돌아갔다. 지금도 명동성당에는 이날의 의거를 기념하는 표지석이 설치돼 있는데 내용은 이렇다. "이재명은 친일 매국노인 이완용을 척살하려 한 독립운동가다. 평북 선천 출생으로 1909년 명동성당에서 벨기에 황제의 추도식을 마치고 나오는 이완용을 칼로 찔렀으나 복부와 어깨에 중상만 입히고 현장에서 체포돼 이듬해 순국했다."
중상을 입은 이완용은 일본인 의사가 집도한 흉부외과 수술 덕에 살아났다고 한다. 수술은 서울대병원의 전신인 대한의원에서 이뤄졌는데 이는 우리나라의 첫 흉부외과 수술 기록인 것으로 전해졌다. 이 기록에 따르면 이완용은 갈비뼈 사이 동맥에 심한 출혈이 있었고 이에 따른 폐 손상으로 좌측 흉부타박상과 외상성 늑막염 등이 생긴 상태였다. 이 기록이 정확한 사실인지 여부는 알 수 없지만 이완용이 죽다 살아난 것은 맞아 보인다.
이날 의거를 보도한 신문 기사를 보면 이재명의 풍채에 대해 "용모가 화려하고 눈에 영채가 있다"고 썼다. 이 아름다운 청년은 미국노동이민회사를 통해 하와이를 거쳐 미국으로 갔는데 조국이 일제에 강점됐다는 소식을 듣고 귀국했다고 한다. 그의 첫 목표는 침략의 원흉으로 꼽히던 이토 히로부미였다. 하지만 거사는 실행되지 못했고, 안중근이 1909년 10월 26일 이토를 사살하자 을사오적을 비롯한 친일매국노를 없애기로 했다. 재판 과정에서 그가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미국에 있을 때부터 이완용을 죽이려고 했다"고 말한 것을 보면 이토를 비롯해 이완용 등도 당초 목표였던 것으로 보인다.
조사 중 공범이 있냐는 질문에 대해서 그는 "공범이 있다면 2000만 동포"라고 당당하게 말했다. 하지만 이듬해인 1910년 일제는 이재명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최후 진술에서 그는 "왜법이 불공평해 나의 생명을 빼앗지만 조국을 위한 나의 충혼은 빼앗지 못한다"고 말했다. 사형은 같은 해 9월13일 집행됐다. 이때 그의 나이는 스물네 살이었다.
김철현 기자 kch@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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