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석대’가 떠올랐다. 이문열의 소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에 나오는 절대권력 급장. 서울에서 시골 초등학교로 전학 간 한병태가 처음 본 엄석대는 “다른 아이들보다 머리통 하나는 더 있어 뵐 만큼 큰 앉은키와 쏘는 듯한 눈빛”을 가졌다. ‘레이저’ 같은 게 나왔나보다.
그가 부르면 아이들은 무조건 달려가야 하고 그를 위한 물당번이 있을 정도다. 그는 찐고구마나 계란, 사과 등을 상납받고 마음에 드는 물건을 빼앗기도 한다. 그럼에도 그는 우수한 성적으로 급장 자리를 공고히 유지한다.
한병태는 이 불합리한 절대권력에 저항하지만 무참한 패배만을 맛 볼 뿐이다. 그리고 굴종. 열매는 달았다. 거의 ‘넘버2’의 지위에까지 오른다. 치명적인 부정, 그러니까 엄석대가 공부 잘 하는 아이들과 시험지에 이름을 바꿔 써왔다는 사실을 알게 됐지만 한병태는 가래를 꿀꺽 삼키듯 넘겨버린다. 또 다시 패배의 가능성이 커 보이는 싸움보다는, 권력에 길들여져 얻고 있는 안온함과 혜택에 안주하고 싶었으리라.
절대권력의 종말은 ‘담임선생’의 교체와 함께 찾아왔다. 시험 1등인데도 수업 시간에 문제를 풀어보라고 시키면 하질 못했다. 부정 시험이라는 명백한 결함이 드러나고 권력의 몰락이 눈 앞에 보이자 엄석대의 충실한 ‘꼬붕’들은 순식간에 태도를 바꿨다. 전에는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새X' 같은 욕설을 써가며 엄석대를 몰아붙인다. 하지만 이전까지 그들은 엄석대의 부정을 누구보다 잘 알고도, 그가 만들어준 굴종의 울타리 속에서 비겁한 웃음을 흘려왔었다.
물론 엄석대가 떠오른 것은 요즘 정국 때문이다. 시험 1등이 문제를 풀지 못하는 것처럼 대통령은 대선 후보 토론회에서 “아유, 그래서 대통령 되려고 하는 거 아니겠어요”라는 식의 적나라한 수준을 보여줬다. 그래도 그는 1등이었고 대통령이 됐다. 사람들은 왕처럼 군림했었던 아버지의 후광에 눈이 부셔했고, “참 나쁜” 같은 유아적 수사도 ‘촌철살인의 고단수’로 애써 포장해 버렸다.
하지만 대중은 그의 실상을 알지 못했을 뿐이었다. 이제 드러난 대통령의 실상은 다리에 힘이 풀릴 정도로 허망하다.
대통령이 버티면서 형식적 권력을 지키고 있지만, 실질적인 권력은 이제 깃털보다도 가벼워졌다. 그러자 ‘형광등 100개를 켜놓은 듯한 아우라’라는 역대급 칭송을 마다 않았던 한 종편은 과거를 잊은 듯 하고, 대선에서 기밀문서를 읊어대며 대통령의 당선을 도왔던 여당 정치인은 예전부터 대통령과 맞섰던 투사인양 한다. 그동안 대통령 주위에 있었던 숱한 '급우들'이 그럴 것이다.
소설에서 한병태는 엄석대 축출의 장에 참여하지 않는다. “내 눈에는 그애들이 석대가 쓰러진 걸 보고서야 덤벼들어 등을 밟아 대는 교활하고도 비열한 변절자로밖에 비춰지지 않았다."는 게 하나의 이유였다. 조폭적 의리보다는 최소한의 부끄러움이 포함된 감정일게다. 우리는 어쩌면 대통령도, 부끄러움도 실종된 시대에 살고 있는지 모른다.
박철응 금융부 차장 hero@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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