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bar_progress

글자크기 설정

닫기

[초동여담]교각살우

시계아이콘01분 26초 소요

[아시아경제 이상국 기자]옛 도시에는 종을 걸어둔 누각이 있었다. 종소리는 치자(治者)의 백성 사랑하는 마음이 온누리에 울려퍼지는 것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굳이 일일이 백성에게 정치에 관해 시시콜콜 설명을 하지 않더라도, 종이 울리면 그 소리를 듣고 군왕의 존재감을 마음 속 깊이 각인시켰다. 이런 종이었기에, 종은 바로 군왕과 다름 없는 존재였다.새로운 종을 만들면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 세상에 고루 퍼지는 평화로운 소리인 원음(圓音)을 기원하면서 말이다. 종소리를 아름답게 하기 위해 아이까지 바친 에밀레종 설화는, 이같은 옛 믿음과 기원의 한 풍경이라 할 수 있다.


신종(新鐘)을 하늘에 고하는 제사에는 건장한 소를 제물로 잡아 그 피를 종의 테두리에 발랐다. 소를 고르는 방식은 엄격했다. 외모가 잘 생기는 것은 물론이고 털빛도 아름다워야 하며, 특히 양쪽 뿔이 하늘을 향해 둥글게 벋어오르는 형상이어야 했다. 종제(鐘祭)를 관장하는 관청에서는 제물로 쓸 소를 비싼 값에 사들였다. 큰 돈을 버는 일인데다 영광스럽기도 한 일이어서 사람들은 자기의 소가 선택되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심사에 임했다.

소를 심사하던 관리가, 참으로 잘 생기고 멋진 소 한 마리가 쓰러져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 그 임자에게 물었다. 그는 눈물을 흘리며 이렇게 말했다. "이번 종루 제사에 쓰일 소는 제가 지닌 저 소가 지극히 마땅하옵니다. 그런데, 오늘 아침 소를 끌고 오다가 보니, 뿔이 조금 삐뚤어 보였습니다. 그래서 쇠망치로 조금 교정한다는 것이, 그만 소를 죽이는 꼴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냥 둬도 되었을 것을 굳이 완벽하게 해보려다 귀한 것을 잃고 말았으니 이런 어리석은 자가 어디 있겠습니까." 관리는 혀를 차며 말했다. "하늘의 뜻이, 인간의 그런 과도한 집착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겠느냐."


3세기 무렵 진(晋)나라의 스토리텔러인 곽박이란 사람이 남긴 '현중기(玄中記)'에 들어있는 이야기를 살짝 각색한 것이다. 뜻은 그저 교각(矯角)이었는데, 결과적으로는 살우(殺牛)를 하게되는 것이 어찌 그 시절 소장수만이겠는가.

[초동여담]교각살우
AD



지난 정권을 눈에 띄게 돕는 바람에 이번 정부에서 미운 털이 박힌데다, 고령으로 창업주의 심신이 미약해진 틈을 타 형과 아우가 거친 쟁탈전을 벌이는 모양새가 국민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던 기업이, 정운호게이트에서 제대로 빌미가 잡혔다. 네이처 리퍼블릭의 롯데면세점 입점 대가로 브로커에게 20억원을 건넨 정황이 포착된 것이다. 여기서부터 코가 꿰인 이 기업은 대대적인 그룹 비자금 수사를 받게 되었고, 부회장이 수사 직전에 자살하는 사태와, 그룹회장인 신동빈씨가 검찰에 소환되는 상황에 이르렀다.부친 신격호, 형 신동주도 검찰의 '부름'을 기다려야 하는 꼴이다.
신동빈회장이 구속기소되면 이 그룹의 경영권은 일본으로 넘어갈 가능성이 커졌다.


잘못을 바로잡는 것이야 누가 말리겠는가. 다만 '바로잡는 방식'이 다른 기업들과 비교했을 때에도 공평해야 하고, 무엇보다 뿔을 바로잡으려다 소를 죽이는 꼴은 면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권력을 쓰는 일이 고루 원만하게 퍼지도록 하는 '종소리 정치'의 원뜻도 한번쯤 상기해볼 일이다






이상국 기자 isomis@asiae.co.kr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AD
AD

당신이 궁금할 이슈 콘텐츠

AD

맞춤콘텐츠

AD

실시간 핫이슈

AD

다양한 채널에서 아시아경제를 만나보세요!

위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