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일 제한 처방약' 悲哀…치료시스템이 더 우울
[아시아경제 정종오 기자] 집단 따돌림으로 우울하고…성적 때문에 우울하고…취업이 안돼 우울하고…늙어 가는데 건강이 허락지 않아 우울하고…아이를 낳은 뒤 우울하고…일이 제대로 풀리지 않아 우울하고…돈이 없어 우울하고…사회의 온갖 비리와 의혹을 보며 우울하고….
현대 사회는 우울증 시대입니다. 우울증을 앓고 있는 사람은 많은데 치료는 제때 이뤄지지 않는 게 현실입니다. 우울증 치료에 새로운 전환점이 모색되고 있습니다.
현재 비(非)정신과 의사들에게 60일로 처방이 제한된 우울증 치료제인 '선택적 세로토닌 재흡수 억제제(SSRI)'에 대한 규제가 특정 항목에서 풀릴 것으로 예상됩니다. 의료계에 초미의 관심사항 중 하나입니다. 복수의 관계자들의 말을 종합해 보면 뇌졸중, 뇌전증, 파킨슨, 치매, 수면장애 등에 한해 'SSRI 처방 60일 제한'이 11월 중에 풀릴 것으로 예상됩니다. 복지부가 그동안 협의를 진행한 결과 이 같은 결론에 이른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그동안 뇌전증, 파킨슨 등을 앓고 있는 질환자들에게 우울증이 발생했을 때 비(非)정신과 의사들은 60일 동안만 SSRI 처방을 했습니다. 이후부터는 보험이 적용되지 않았고 정신과로 이첩하는 시스템이었습니다. 이를 두고 대한뇌전증학회 등 비(非)정신과 의사들은 "우울증 환자가 급증하고 있는 상황에서 SSRI의 처방 제한은 현실적이지 않고 철폐돼야 한다"고 줄곧 주장해 왔습니다.
반면 정신과 의사단체들은 "우울증은 단지 약물로만 치료되는 게 아니고 종합적인 정신과 치료가 필요하다"며 SSRI의 처방 제한을 주장해 왔습니다. 이런 가운데 보건복지부는 최근 이해 당사자들과 협의를 진행했고 11월 중에 결론을 내기로 방침을 정했습니다. 고형우 복지부 보혐약제과장은 "현재 이해 당사자들과 막바지 협의를 진행 중에 있다"며 "11월 중에 결론을 낼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우울증의 시대=우리나라는 지금 '우울증의 시대'라고 표현해도 지나친 말은 아닙니다. 우울증 환자가 매년 급증하고 있습니다. 우울증을 제때 치료하지 않으면 스스로 목숨을 끊는 극단적 선택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실제 최근 자살자들을 대상으로 심리 부검을 실시한 결과 10명중 9명은 우울증을 앓았던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우울증에 적극 대처할 수 있는 의료시스템 마련이 시급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국민건강보험공단의 자료를 보면 우리나라 우울증 환자는 매년 증가하고 있습니다. 2010년 51만6579명에서 2015년 60만3040명으로 늘어났습니다. 진료비도 2010년 2222억4000만 원에서 지난해 2623억3000만 원으로 약 400억 원 가량 증가했습니다. 우울증 환자는 여성에게서 더 많이 발병합니다. 2010년 우울증 환자 중 여성은 35만9815명, 남성은 15만6764명으로 여성이 69%를 차지했습니다. 2015년에도 비율에서 거의 변함이 없습니다. 여성 40만7230명, 남성 19만5810명으로 여성이 67%를 차지했습니다.
연령대별로 보면 50~70대 이상에 집중돼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2015년 우울증 전체 환자 중 50대는 11만6052명, 60대 10만4478명, 70대 10만6660명에 이르렀습니다. 고령화 시대에 접어들면서 우울증 환자의 연령대로 높아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특히 노인의 경우 빈곤 상태인 경우가 많아 이 또한 우울증에 영향을 끼치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치료 시스템 혼란=현재 우리나라는 우울증 치료와 관련해 두 가지 시스템으로 이뤄집니다. 정신과 의사와 비(非)정신과 의사가 우울증 치료를 할 수 있습니다. 비(非)정신과 의사(신경과, 내과, 소아청소년과 등)들은 SSRI를 60일 이상 처방할 수 없습니다. 일종의 규제에 묶여 있습니다.
반면 정신과 의사는 SSRI를 무한정 처방할 수 있습니다. 이렇다 보니 뇌졸중, 뇌전증, 피킨슨병, 치매, 수면장애를 호소하는 이들에게서 나타나는 우울증에 대한 치료방법이 마땅치 않은 실정입니다. 신원철 대한뇌전증학회 총무(강동경희대병원 신경과 교수)는 "SSRI는 투약량을 조절하면서 처방해야 하는데 60일 동안의 제한에 걸려 이를 제대로 운용할 수가 없다"며 "투약량을 처음에는 적게 시작해 점점 늘려나가는데 환자가 어느 정도 반응할 때쯤에 투약을 할 수 없게 되는 지경에 이른다"고 설명했습니다.
우울증 치료약에 대한 논란도 벌어지고 있습니다. 현재 우울증 치료에 쓰이는 약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1960년대 개발된 '삼환항우울제(TCA)'와 1990년대 개발된 SSRI가 대표적입니다. SSRI에 대한 비(非)정신과 의사의 처방은 제한이 있는 반면 TCA는 누구나 처방할 수 있습니다. 이렇다 보니 비(非)정신과 의사들이 TCA를 처방하는 사례가 많습니다.
문제는 TCA의 경우 부작용이 만만치 않다는 데 있습니다. TCA를 지나치게 많이 사용하면 미각을 잃는 것은 물론 비만과 부정맥 등의 부작용이 보고되고 있습니다. 심지어 과다 복용했을 때 사망에 이를 수도 있다는 분석도 나왔습니다. 이 때문에 전 세계적으로 TCA의 사용은 줄어들고 있습니다. 치명적 부작용의 위험으로 거의 사용하지 않는 TCA 항우울제를 우리나라 우울증 환자가 복용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비(非)정신과 "SSRI, 제한 풀어야"=이 같은 현실을 지적하면서 비(非)정신과 의사들은 SSRI의 제한 철폐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홍승봉 대한뇌전증학회 회장은 "우울증 치료에 사용되는 TCA의용량은 하루에 100~300㎎인데 이를 한꺼번에 먹으면 사망에 이를 수도 있어 외국에서는 이른바 '자살약(suicide drug)'으로 알려져 있다"며 "반면 SSRI는 75일 분을 한 번에 먹어도 사망하지 않을 정도로 안전하다"고 말했습니다. '안전한' SSRI 치료제가 제한에 묶여 '부작용이 심각한' TCA를 어쩔 수 없이 처방하는 이 같은 불합리한 시스템은 개편돼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홍 회장은 "세계 경제 순위 141위인 르완다에서도 모든 의사가 안전하고 효과가 좋은 SSRI를 자유롭게 투여한다"며 "SSRI는 우울증뿐 아니라 불안증에도 매우 효과가 있고 두통, 통증, 분노조절장애, 감정불안에도 효과가 좋은 약"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정신과 "우울증, 종합적으로 대응해야"=정신과 의사들은 이 같은 비(非)정신과 의사들의 주장에 대해 반박하고 있습니다. 우울증을 단지 약물치료로만 접근하면 제대로 된 치료가 되지 않을 것이란 지적입니다. 60일 동안의 SSRI 처방으로 진전이 없다면 이를 정신과로 이첩해 종합적 치료로 대응해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정한용 대한신경정신의학회이사장은 "우울증의 진행과정을 면밀히 지켜보는 것이 중요하다"며 "우울증을 약물로만 치료한다는 생각은 단편적 생각이고 종합적으로 대응하는 치료 시스템이 중요하다"고 강조했습니다. 정 이사장은 "SSRI 제한 규정을 두고 현재 복지부를 중심으로 이해관계자들과 협의를 진행하고 있는데 무엇보다 누구나 인정할 수 있는 원칙을 정하는 게 필요하다"고 말했습니다.
고형우 복지부 과장은 "정신과와 비(非)정신과 의사들과 협의를 진행하고 있고 어느 정도 합의에 접근하고 있다"며 "어느 정도까지 제한 규정을 푸는 것이 좋은지, 우울증 치료에 가장 최적의 방법은 무엇인지를 두고 협의를 해 나가고 있고 11월 중에 결론에 이를 것"이라고 전했습니다.
◆입체적 치료 시스템 중요=현재 복지부가 중심이 돼 이뤄지고 있는 협의에서 뇌졸중, 뇌전증, 파킨슨, 치매, 수면장애 등에 국한해 SSRI 처방 제한이 풀릴 것으로 기대됩니다. 이는 현실적으로 우울증과 동반되는 질환에 적극 대처하기 위해서는 필요하다는 데 공감대가 형성된 것으로 풀이됩니다. 우울증은 현대인의 대표적 질병 중 하나입니다. 건강보험공단의 통계에서 우울증 환자는 지난해 약 60만 명으로 집계됐습니다. 실제는 이보다 훨씬 많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정신과와 비(非)정신과를 떠나 '마음의 병'을 앓고 있는 우울증 환자에게 가장 최적의 치료 시스템은 무엇인지를 고민하고 이에 대한 대책 마련이 필요해 보입니다.
정종오 기자 ikokid@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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