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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진석의 몸으로 쓰는 이야기] 단지동맹, 혈서입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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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진석의 몸으로 쓰는 이야기] 단지동맹, 혈서입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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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09년 2월 7일, 러시아 그라스키노 근처에 있는 카리에 조선 청년 열두 명이 모였다. 조국의 운명이 바람 앞의 등불인 이때, 청년들은 왼손 무명지를 끊어 피로써 태극기 앞면에 '대한독립(大韓獨立)'이라 썼다. 이들은 "일제 원흉과 친일반역자들을 반드시 처단하겠노라, 만약 3년 이내에 이를 성사시키지 못하면 자살로써 동포에게 속죄하겠노라" 맹세하고 하늘에 제사를 올렸다. 이를 단지동맹(斷指同盟)이라 한다.


 같은 해 10월 26일, 하얼빈 역에 총성이 울리고 일본제국주의의 상징과도 같은 이등박문(伊藤博文. '이토 히로부미'라 해야 옳으나 어감을 고려해 우리말 독음을 사용한다)이 차가운 플랫폼에 머리를 떨군다. 조선 청년 하나가 벨기에제 브라우닝 권총의 방아쇠를 당겼으니 곧 의사(義士) 안중근, '동의단지회'라고도 하는 동맹의 취지서를 작성한 인물이다. 그는 "나는 대한의군 참모중장으로서 적장(敵將) 이등박문을 사살했다. 나를 포로로 대우하라"고 요구했다.

 안중근은 옥중에서 글을 많이 썼고, 그 가운데 여럿이 남아 있다.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입안에 가시가 돋는다(一日不讀書 口中生荊棘)'는 유묵은 매우 잘 알려졌다. 유묵에는 공통적으로 '대한국인 안중근 서(大韓國人 安重根 書)''라고 쓴 뒤에 손바닥이 찍혀 있다. 힘차고도 단정한 휘호 아래 무명지 끝마디가 없는 왼손바닥에 먹을 묻혀 도장처럼 눌렀다.


 무명지는 약지(藥指)라고도 한다. 로마인들은 무명지에 심장으로 이어지는 신경이 있다고 믿었다. 오늘날에도 병 고치는 손가락으로 알려져 있다. 자주 쓰이지 않아 깨끗한 손가락으로 인식된다(데즈몬드 모리스). 불교에서는 약사여래의 상징이다. 일본 고류사 미륵반가사유상은 약지를 구부려 원을 그리고 나머지 손가락들을 세우고 있다. 카를 야스페르스는 미륵불을 '인간 존재의 가장 청정하고 원만하며 영원한 모습의 표징'이라고 하였다(주강현).

 안중근이 무명지를 끊은 지 30년이 지날 즈음, '만주일보'의 1939년 3월 1일자에 반도 청년 하나가 만주군관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혈서를 썼다는 기사가 보도되었다. 어느 손가락을 베어 피를 냈는지는 알 수 없다. 조선시대에 나온 '삼강행실도(三綱行狂圖)'의 '석진단지(石珍斷指)' 대목을 보면 효자 석진이 앓는 아버지를 위해 칼로 무명지를 벤다. 대개 진심을 담아 피를 낼 때는 무명지를 택한 듯하다. 반도 청년의 혈서는 무슨 뜻인가.


 일제의 패망이 멀지 않은 1943년에 경성의 '오케레코드'에서 음반 한 장을 낸다. 조명암이 노랫말을, 박시춘이 곡을 썼다. 남인수, 박향림, 백년설이 노래를 불렀다. 1절 가사는 이렇다. '무명지(약지) 깨물어서 붉은 피를 흘려서/일장기 그려 놓고 성수만세 부르고/한 글자 쓰는 사연 두 글자 쓰는 사연/나랏님의 병정 되길 소원합니다'. 이 노래는 광복 후 가사만 바꿔 국군의 군가로 사용되었다. '태극기 그려놓고 천세만세 부르고…'.


 이로써 이 나라 골수에 스민 친일의 시원이 참으로 깊고도 멂을 깨닫는다. 혈서를 쓰고 만주군관학교에 기어이 입학한 그 반도의 청년은 이등박문이 죽은 지 70년 뒤 같은 날에 권총에 맞아 세상을 하직한다. 이등박문은 일하러 갔다가 죽었지만 반도 청년은 부하들과 술을 마셨다. 시바스 리갈.
허진석 문화스포츠 부국장 huhba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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