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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제림의 행인일기]동경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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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제림의 행인일기]동경에서 윤제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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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경에 왔습니다. 출장입니다. 대학박물관과 도서관을 중심으로 여러 전시공간을 돌아보고 배울 만한 대목을 찾아 나선 길입니다.


이제 많이 익숙해진 나라라서 놀랍고 신기한 것은 드물지만, 질투와 부러움이 일어나는 대목은 여전히 적지 않습니다. 지금 저는 무사시노(武藏野)미술대학 도서관에서 그런 감정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난생 처음 도서관에 온 것 같은 느낌이랄까. 광화문 어느 대형서점 한복판에 홀로 서 있는 섬마을 소년의 기분이랄까.

건축 테마('책의 숲')에 걸맞게, 책들이 나무들의 정령(精靈)처럼 도서관에 들어서는 사람들과 눈을 맞춥니다. 전체적인 인상은 신전처럼 거룩하고,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목조계단은 제단처럼 위엄이 있습니다. 빈 서가(書架)로 연출된 벽면은 책이 천상의 비밀을 담은 그릇이라는 것을 보여주려는 주술적 의도로도 읽힙니다.


도서관은 사람의 생각이 하늘에 최대한 가까이 다가서는 곳이란 것을 염두에 두었는지, 자연광을 끌어들여 시간의 움직임을 몸으로 느끼게 합니다. 모퉁이마다 마련해놓은 명품 의자들은 책 속에서 걸어 나올지도 모를 위대한 저자들을 모시려는 자리처럼 보입니다.

[윤제림의 행인일기]동경에서


'지구상의 아름다운 도서관 베스트 20'에 선정된 곳답게 태(態)가 다릅니다. 일본을 대표하는 건축가 '단게 겐조(丹下健三)'가 동경 한복판에 지은 성모 마리아 대성당 같은 숙연함이 있습니다. 당연히 책들의 표정도 평화롭습니다.


왜 아니겠습니까. 그들에게는 '5성급 호텔' 투숙객의 여유가 보입니다. 책꽂이들이 부산항 야적장 컨테이너들처럼 무심하게 늘어서 있지 않습니다. 빼곡한 서가를 배경으로 무표정한 책상들이 의무적으로 줄을 맞추고 있지도 않습니다.


저는 이 도서관을 '책의 교회'라 부르고 싶어집니다. '안도 타다오(安藤忠雄)'가 지은 '물의 교회'나 '빛의 교회'와 다르지 않아 보이는 까닭입니다. 종교적 영성(靈性)을 불러오는 곳이기보다는 저마다의 마음 속 스승을 영접하는 장소로 보입니다. 신심이 우러나옵니다. 십일조(十一租)를 바치고 싶은 생각까지 일어납니다. 누군가에게 절을 하고 싶어집니다.


누구겠습니까. 책이란 이름의 신입니다, 하느님입니다. 저는 지금 새삼스럽게 일본이 숭배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떠올려봅니다. 제 혼자 취해서 끌어낸 생각입니다만, 일본은 태양과 책의 나라인 것 같습니다. '일(日)+본(本)'. 그들은 책을 하늘처럼 모시고 우러릅니다. 천황에게 길을 묻고 책에서 '본'을 받습니다.


일본의 책들은 행복합니다. 차를 타고 지나치는 조그만 마을, 작은 도시에도 도드라져 보이는 건물 하나는 책방입니다. 마을사람들이 믿고 따르는 정신의 신사(神社)입니다. 자연과 절대자에게 일일이 묻고 배울 수 없는 것들을 스스로 배우고 깨치려는 자각의 교실입니다.


어떤 책방은 수녀님 혼자서 지키는 공소(公所) 같고, 어떤 서점은 개척교회를 닮았습니다. '책(本)'이라는 글자를 '십(十)자'나 '만(卍)자' 표지처럼 내걸고 있는 책의 사원들입니다. 저마다의 경전을 들고 저마다의 신을 모시는 사람들이 있어 책방 풍경은 아름답고 성스럽습니다.


녹차가 아니라, 손수 원두를 볶아서 직접 내린 커피를 대접하는 젊은 스님의 암자가 떠오르는 곳도 있습니다. '다이칸야마(代官山)'에 있는 '쯔타야' 책방입니다. 서점인가 하면 커피숍입니다. 책이 편의점과 만나고 스포츠용품과 만나며 요리 도구들과 만납니다. 책이 정물이 아니라 생물로 일어나 꿈틀거립니다.


외국의 서점에서 우리나라 책들의 풍경을 생각합니다. 적이 다행스러운 것은 요즘 우리나라에도 동네책방이 살아난다는 소식을 자주 듣게 된 점입니다. 작고 소박하지만 생각이 남다른 서점들입니다. 후배 시인이 시집 전문 서점을 차렸다는 전갈은 무척이나 반가웠습니다. 대기업 임원을 지낸 카피라이터가 자신의 이름을 내건 서점을 연다는 뉴스 또한 흥미롭습니다.


거대한 성전이 아니라 개성적이고 매력적인 책의 교회를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기다려온 일입니다. 복음(福音)이 종교시설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책방에도 있음을 깨달은 형제들이 늘어난 증거입니다. 그중엔 인터넷 세상의 엉터리 교주들에 속았던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움베르토 에코'의 얘기를 진작 귀담아 들었어야 했다고 후회하면서 책방으로 돌아오는 사람들일 것입니다. "인터넷은 신이다. 그런데, 아주 멍청한 신이다."


일본이 여전히 우리 앞에 있는 이유를 가만히 짚어봅니다. 분야마다 다양한 까닭이 있겠지만, 누구도 부인하기 어려운 이유 하나는 그들의 손엔 아직도 책이 들려 있다는 사실일 것입니다. 돌이켜보건대, 우리는 너무 빨리 책을 내려놓았습니다. 너무 서둘러 책을 덮었습니다.


동경의 박물관과 도서관과 책방을 둘러보면서, 제 믿음은 더욱 단단해지고 있습니다. 과거는 박물관에 있고, 현재는 인터넷에 있고, 미래는 책에 있다는 생각이 그것입니다.


윤제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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