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한 지 수년이 지나는 동안 아이를 가질지 말지 가끔 고민했다. 대체로 고민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험한 세상에 아이를 내놓기 두려운 건 다 마찬가지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세계가 살아낼 만한 가치가 있다는 데 스스로 설득되어야 하나의 생을 내어놓을 수 있을 것이다. 나같이 겁 많고 유난 떨기 좋아하는 부류는 따라서, 출산율에 기여하려면 뉴스를 멀리해야 한다. 예컨대 한 여행객 일행이 심장마비를 일으킨 택시기사를 두고 신속히 자신의 골프가방을 챙겨 다른 택시로 갈아타고 떠나버렸다는 뉴스.
어떻게, 사람이. 들끓는 댓글을 보니 악마란 말도 서슴없다. 그러나 어디 ‘악’이 그렇게 명료한가. 마음을 가다듬고 이런저런 정황을 상상해본다. 함부로 짐작하지 않으려 해도 여전히 참혹한 것은, 사람이 마땅히 '놀라는 것'이 자연스러운 상황에서 그들로 하여금 멀쩡히 다음 행동을 하게 만드는 그 무엇이다. 택시기사가 이미 의식을 잃은 채 직진해서 주변 차량을 들이받았다니 승객도 놀랐을 터다. 놀라면 놀라야 하는 게 인간이다. 심장이 뛰고 손이 떨리며 생각이 멈추고 행동도 굼떠지는, 일종의 ‘무력함'을 보이는 것. 그래서 소리를 치고 도움을 청하는 것. 거창하게 선악을 따지기 전에, 비행기 탑승 일정이 촉박한지 따지는 능력이 작동하기 전에.
무력해질 때야 인간은 제가 보잘것없는 줄을 알고, 보잘것없는 시간 속에서 고개 드는 것이 ‘인간성’이라고 나는 믿는다. 12시간을 꽉 채우고도 넘은 동생의 산고(産故)를 지켜보는 동안 느꼈다. 내 눈엔 아직 막둥이일 뿐인 동생이 짐작할 길 없는 고통 속에 있는데,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아프도록 내버려두는 일뿐이라니. 동생을 지켜보는 모두가 완벽히 무력했으므로 그 시간만큼은 우리에게 기도하는 손 외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그리고 그렇게 텅 비워지고서야 오직 안녕과 축복만을 비는 마음, 그러니까 인간성 비슷한 무언가가 들어섰다.
그렇게 우리에게 온 조카는 또 얼마나 무력해서 아름다운지. 때때로 가느다랗게 우는 것 말고는 할 줄 아는 게 아무것도 없는 나의 조카. 아무 힘이 없어 아무것도 해칠 수 없고 심지어 똥도 너무 조금 싸서 세상을 더럽힐 수조차 없다. 저 콩알만 한 것들 언제 사람 되나, 신생아실 유리벽 밖에서 손주를 지그시 바라보던 한 어르신의 입가에 미소가 만발하다. 저들보다 아름다운 사람을 전 거의 못 봤는걸요. 속으로 중얼거린다.
조카가 딸꾹질을 한다. 딸꾹질 한 번 하는데 온몸이 들썩인다. 딸꾹질하며 타이핑을 하고 딸꾹질하며 전화통화를 하고 딸꾹질하며 술도 마시는 어른이 나중에 되겠지만, 아직은 딸꾹질만 하는데도 온몸이 필요하다. 서너 살만 돼도 이런저런 일들을 혼자 해내며 자기보다 약한 것들을 분별하겠지. 저 아이는 자신이 지금 얼마나 짧고 귀한 시절을 지나는지 알지 못한다.
이다음에 누굴 미워해서 그를 나쁘게 대하고 싶은 마음이 들거든, 도저히 인간을 이해할 마음이 생기지 않거든, 너에게 그토록 무력해 아름다웠던 때가 있었다고 말해주고 싶다. 그때 함께 강보에 싸여 있던 친구들 누구도, 누구를 미워하지 않았다고. 조카가 딸꾹질을 멈추고 무슨 꿈을 꾸는지 입술을 실룩인다. 네 자그만 몸 어딘가에 지금 이 시절이 새겨져, 훗날 생의 유혹에 흔쾌히 설득되기를. 그래서 네 엄마처럼 또 다른 생을 만들어낼 수도 있기를.
이윤주 에세이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