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마 뒤를 가방으로 가린 여성이 계단을 올라간다. 눈은 앞에 있으나 의식은 뒤에 있다. '누군가 빤히 올려다보는 느낌이다, 요새 몰카도 있다던데, 넘어지면 안 된다, 왜 내가 내 옷 입고 이런 고민을 해야 하나, 빨리 여길 벗어나고 싶다.' 고작 몇십 걸음 안 되지만 이러한 긴장은 반복되어 버릇이 된다. 행여 익숙하다 해도, 자신의 보행을 구속한다는 점에서 이 버릇은 자학적이다. 손톱을 물어뜯는 일처럼.
불편하면 입지 않으면 될 것 아니냐고, 무식한 소리를 대놓고 하는 사람은 많지 않겠으나 '어쨌거나 치마는 그래서 불편한 것'이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그렇지 않다. 겹겹이 몸을 옭는 한복치마가 아니고서야. 조신하게 입으라니까 불편한 거지, 원래 불편한 게 아니다. 불편한 디자인이라면야 바지에도 많다.
시인 문정희는 '치마'라는 시에서, '그 은밀한 곳에서 일어나는 / 흥망의 비밀이 궁금하여 / 남자들은 평생 신전 주위를 맴도는 관광객'이라고 했지만, 정작 남자들이 영원히 몰랐으면 하는 치마의 비밀은 역설적으로, 해방감이다. 치맛자락 사이로 바람이 드나들 때 맨다리에 팔락이는 옷감과 공기의 보드라운 마찰은, 원시(原始)의 유쾌다. 그해 첫 치마를 입고 거리에 나설 때 여성들은 저마다 봄을 열어젖힌다. 겨울잠 털고 나온 개구리처럼 펄떡이는 마음은, 사타구니를 가로막는 바지에 갇힌 남자들을 따돌리는 '우리끼리의 기쁨'이다.
치마는 게다가 아름답다. 아름다움은 실용성을 쉽게 압도한다는 걸, 잠시 학교 선생을 할 때 소녀들에게서 배웠다. 한겨울의 교복치마가 너무 추워 보여 바지를 입을 수 있도록 학교에 건의하는 게 어떠냐고 했더니, 교복 바지는 원하면 언제든 구입할 수 있다는 거였다. 추워도 치마가 예뻐서요! 소녀들은 입을 모았다.
맹렬해진 태양이 지상을 덥힐수록 아름다운 치마들이 거리를 '물들인다'. 이런 감상에는 내가 여성이 아니라면 쉽게 발설하지 못할 지점이 있다. '짧은 치마 입어줘서 땡큐' 수준의 저열한 감수성이,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존재하는 것이다. 아름다움은 알아보는 사람의 것이므로 치마를 사랑하는 일에는 성별이 없기를, 하릴없이 바란다. 저 유명한 지하철 통풍구 위의 먼로를 '핀업걸' 이상으로 보지 못하는, 그 아름다운 플레어스커트의 입체감을 못 느끼는 감수성은 그래서 딱하다. 한 인간의 지평은 딱 그의 상상력만큼이다.
요즘은 아주 없어졌길 바라지만 '아이스케키' 같은 기괴한 어린이 문화(?) 속에서는 치맛자락의 나부낌이 얼마나 쾌활한지 설명하기가 더 요원하다. 국어사전은 아이스케키를 '어린아이들이 장난으로 여자아이의 치마를 들추며 내는 소리'라고 정의한다. 만일 내게 어린 딸이 있다면? 훗날 계단을 오를 때마다 신경이 곤두서야 하는 딸의 운명은, 아이스케키를 당하면 얼굴을 붉히며 울음을 터뜨리길 기대하는 시선에서 시작될지 모른다. 아이스케키를 하고 도망가려는 바보에게 나의 '되바라진' 딸이 쏘아붙이는 장면을 상상해 본다. "치마 안에는 속옷이 있고 그 안에는 엉덩이가 있을 뿐이야, 멍청아."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될 것이다, 딸의 운명은. 성범죄가 미니스커트 탓이라고 말하는 멍청이들이 잔류하는 한.
이윤주(에세이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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