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그사람 - 110년전 오늘 타계한 물리학자 피에르 퀴리
"라듐은 범죄자들 손에 들어가면 위험한 물질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 바로 이 자리에서 스스로에게 물어봐야 합니다. 자연의 비밀을 캐는 것이 인류에게 얼마나 도움이 될까. 그 비밀을 안다고 하더라도 제대로 활용할 수 있을 만큼 인류는 성숙한가?" 1903년 마리 퀴리와 그의 남편 피에르 퀴리가 라듐을 발견한 공로로 노벨물리학상을 받으며 한 수상연설이다. 과학자가 인류에게 던지는 자성의 질문이 담긴 이 연설은 너무나 유명한 '퀴리 부인'이 아니라, 남편 피에르 퀴리가 했다. 하지만 그는 3년 뒤 불의의 마차 사고로 갑자기 숨졌고 그의 삶은 부인 마리 퀴리에 그늘에 가려 제대로 조명 받지 못했다.
19일은 피에르 퀴리가 세상을 떠난 지 110년이 되는 날이다. 미국 전기저술가 데니스 브라이언이 쓴 '퀴리 가문'을 보면 그는 과학자 집안에서 태어난 예민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대학 입학 전까지는 정규 교육을 받지 않고 홀로 자유롭게 공부를 했다. 피에르 퀴리는 19살 때 연인을 잃은 충격으로 평생 독신으로 살겠다고 결심했지만 서른다섯의 늦은 나이에 마리 퀴리와 사랑에 빠졌다고 한다. 마리 퀴리는 폴란드 출신 이민자였고 여성이었다. 프랑스 과학계의 기득권 세력이 마리 퀴리를 인정하지 않을 때 곁을 지킨 것이 피에르 퀴리였다.
1895년 결혼한 이들의 사랑은 마리 퀴리가 남긴 '내 사람 피에르 퀴리'에 절절하게 표현돼 있다. 마리 퀴리가 남편을 회상하며 쓴 전기와 그들의 라듐발견 실험 일지를 묶은 이 책에서 피에르 퀴리는 자상한 남편인 동시에 자연과 과학의 꿈을 사랑하며 연구에 정진했던 성실하고 독창적인 과학자로 그려지고 있다. 마리 퀴리는 남편에 대해 이렇게 회고했다. "그는 이상을 추구하기 위해 단호하게 몰두했고, 인격과 재능만을 도구로 삼아 묵묵히 자신의 일을 해나가며 인류에 봉사한 사람이다. 그는 과학과 이성만이 평화를 가져올 수 있다는 신념을 갖고 있었기에 진리 탐구에 삶을 바쳤다." 또 남편을 잃고 쓴 일기에서 마리 퀴리는 "당신 없는 삶은 잔인하고,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는 번민이자, 바닥없는 고뇌이며, 끝없는 비탄입니다"라고 했다.
피에르 퀴리와 마리 퀴리의 사랑은 훗날 떠들썩했던 마리 퀴리의 불륜설로 인해 조금은 희석된 측면이 있다. 마리 퀴리가 노벨화학상을 받은 1911년 한 신문에서 그와 프랑스 물리학자 폴 랑주뱅이 연인 관계라고 보도한 것이다. 마리 퀴리는 남편 사후 혼자였지만 랑주뱅은 아내와 자식이 있었다. 게다가 랑주뱅은 피에르 퀴리가 아끼던 제자였다. 미국 작가 바버라 골드스미스가 쓴 '열정적인 천재, 마리 퀴리'는 마리 퀴리가 폴 랑주뱅과의 애정행각이 발각되면서 당시 구설에 오르내렸다는 내용을 다루고 있다. 불행한 결혼 생활을 하던 랑주뱅에게 어떻게 아내와 헤어질 것인지 지시하는 편지가 공개되면서 가정 파탄의 주범으로 몰리기도 했던 사연도 소개하고 있다.
랑주뱅과의 관계가 불거지자 마리 퀴리는 1911년 노벨위원회로부터 수상을 거절해달라는 제안을 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마리 퀴리는 "상은 과학자의 사생활이 아니라 업적에 주어지는 것"이라며 시상식에 참석했고 랑주뱅과는 헤어졌다. 마리 퀴리의 말대로 인류가 기억하는 것은 사생활이 아니라 업적이다. 피에르 퀴리와 마리 퀴리가 발견한 라듐은 오늘날 암의 방사선치료에 쓰이며 수많은 생명을 살리고 있다.
그들은 돈방석에 앉을 수 있는 라듐 제조방법을 개발했으나 특허를 내지 않았다. 돈을 추구하는 것은 학자의 정신에 위배된다는 이유였다. "라듐의 소유자는 지구이며, 그 누구도 이것으로부터 이득을 취할 권리는 없다"고 했다. 아인슈타인은 연구 중 지속적인 방사능 노출로 마리 퀴리가 1934년 백혈병으로 숨지자 이렇게 애도했다. "유명한 사람들 중 명예 때문에 순수함을 잃지 않은 유일한 사람이었다."
김철현 기자 kch@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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