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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선 칼바람 뚫고, 용꿈 향해 튀는 '옥새사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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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윤의 '스타 총선후보 집중탐구' - 여당대표 김무성, '엇朴'으로 대선까지?

총선 칼바람 뚫고, 용꿈 향해 튀는 '옥새사나이' 일러스트 = 오성수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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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의 행복은 가장 나약한 자들이 벌이는 가장 치열하고 위험한 싸움에서 비롯되는 행복이다. 그 싸움이 오로지 나 혼자만의 것이 아님을 알게 됐을 때 느끼는 행복이다. 문학은 '우리 시대의 영웅'이 슈퍼스타가 아니라 동시대의 소수자들, 고독한 패잔병들, 같은 운명을 나누는 먼 곳의 친구들임을 알려준다.”

작가 심보선이 털어놓는 문학에 대한 내밀한 고백에 자꾸만 선거와 정치를 혐오하는 청춘의 자화상이 현시되는 건 왜일까. 문학의 자리에 기꺼이 ‘선거’를 앉혀본다면? 우리 시대의 영웅이 슈퍼스타가 아니라 동시대의 소수자임을 알려주는 지표로서의 선거가 치러진다면? 망상에 가까운 봄날의 꿈일 테지만, 잠시간 입가에 번지는 미소를 막을 수 없다.


투표하지 않은 청춘은 사회를 원망한다. 쟁취하기 전에 먼저 주어졌어야 하는 권리가 아니었는가 항변해보나 세상은 달라지지 않는다. 내 최저시급이 6,030원에 멈춰있을 때, 정치인들은 총선 기간 끽해야 하루 144,720원어치 무릎을 일주일쯤 꿇고 여의도에 입성해 연간 1억 3,796만 1,920원을 가져간다. 이런 청년세대를 향해 "쉬운 일만 선호하는 것은 큰 문제"라고 일침을 가한 배짱 좋은 남자가 있다. 김무성(새누리당 대표, 부산중구영도구) 대표의 발언은 공감과 경험이 아닌 위도가 다른 세계에서 내려오는 훈수와 관전평처럼 회자되곤 하지만, 청와대의 자장권 안에 있는 여당의 대표로서 간혹 궤도이탈에 가까운 독단적 행보를 벌이다 이내 ‘30시간의 법칙’에 의해 제자리로 돌아오는 능동적 유연함에 대중은 탄복한다. 친일논란의 거부(巨富) 부친의 영향력으로 유복한 유년시절을 보내고, 민주투사의 적장자를 자처하며 정계에 입문, 공주의 가신을 거쳐 5선 여당 대표로 탄탄대로를 지나 차기 대권을 바라보는 그의 정치적 목표와 숨은 비전은 무엇인지 솔직함을 넘어선 과거 김무성의 말(칼럼, 연설, 인터뷰)을 통해 살펴보고자 한다.

총선 칼바람 뚫고, 용꿈 향해 튀는 '옥새사나이' 김무성 대표는 김영삼 전 대통령과 인연을 맺으며 정계에 입문, 이후 탄탄대로를 걷게 된다. 사진 = 김무성 의원 홈페이지



“뿌연 하늘을 원망할 게 아니라 스스로 실천해 나갈 일이다.” - 1995. 4. 25 신문 칼럼


중국발 미세먼지 경보로 국민 건강이 크게 위협받고 있는 가운데 과거 김무성 대표는 신문 칼럼에서 날로 악화되는 대기오염에 시민들이 먼저 나서 기민하게 대처할 것을 주문한 바 있다. 당시 그의 직위는 내무부 차관으로 40대 초반의 비관료출신 차관 발탁으로 화제를 모았는데, 김영삼 전 대통령의 전폭적 지원을 받아 14대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에서는 행정실장을, 취임 직후엔 청와대 민정 수석비서관을 거쳐 문민정부 최연소 차관을 역임했다. 대선을 앞두고 어려움을 겪던 YS를 물심양면 지원하고 보필해 두터웠던 신임이 인사에 반영된 것이 아니냐는 평이 이어졌고, 젊은 정치신인은 재력과 권력을 손에 쥐고 거침없이 전진했다. 내무부 차관 시절 김 대표는 “행정은 서비스지 규제가 아니다”고 강조하며 경제와는 다소 동떨어진 업무에 익숙한 관료를 상대로 경제공부를 강조, 매주 특강을 여는 적극성을 보였는가 하면 YS가 중점적으로 추진한 금융실명제와 부동산실명제와 같은 개혁과제를 놓고 “개혁을 반대하고 개혁에 저항하는 사람부터 개혁해야 한다”고 입장을 밝히는 등 다소 호전적 행보를 이어나갔다. 그의 직선적인 언사(言辭)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것이 아닌 셈이다.


총선 칼바람 뚫고, 용꿈 향해 튀는 '옥새사나이' 1999년 한일어업협정 지역, 사진 = EBS ' 지식채널 e' 화면 캡쳐



“일본과 전쟁을 불사하더라도 한일어업협정을 즉각 파기하라!” - 1999년 11월 4일 한나라당 부산집회


김대중 정권의 한일어업협정을 두고 강도 높은 비난의 선봉에 섰던 당시 한나라당의 저격수는 김무성 대표였다. 그는 “한일어업협정으로 부산의 수산업계가 뿌리째 흔들리고 있다”며 “전국 최고인 부산의 실업률이 더 높아지게 됐다”고 주장했다. 외교 문제에서 지역경제와 일자리 현안을 더해 직격탄을 날린 그는 그해 10월 국정감사에서 “일본의 요구(독도 인근 중간수역 자원 공동 관리 방안)는 독도의 영유권까지 관리하려는 음모인데, 해수부가 일본과 비밀협상을 벌인 것 아니냐”며 “어업권을 포기하더라도 요구에 응해서는 안 된다”고 독도 문제에 대해 타협 없는 강경한 입장을 표명한 바 있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 했던가. 지난 2010년 9월 10일 일본이 독도를 고유의 영토라고 명시한 <방위백서>를 발표하자 이에 대해 김 대표는 “일본 관광객이 줄어들 수 있으니 무시하고 넘어가자”고 주장해 논란을 빚었다. 물론 김 대표의 발언 배경에는 독도를 현재 대한민국이 실효지배하고 있으며, 이 같은 도발은 묵살하는 것이 외교적으로 좋은 방법이라는 생각이 깔려 있었겠으나 집권당 원내대표의 발언이라 하기엔 지나치게 경솔했던 것이 아니냐는 비판이 이어졌다.


총선 칼바람 뚫고, 용꿈 향해 튀는 '옥새사나이' 김무성 대표는 2008년 총선을 앞두고 당의 공천학살에 스스로 탈당을 선언했다. 당시 탈당기자회견 도중 눈물을 훔치는 김무성 대표.



“저는 한나라당의 주인입니다.” - 2008. 4. 14 인터뷰 중


20대 총선 공천권을 놓고 후보등록 당일까지 내홍을 겪은 새누리당 격랑의 중심에는 김무성 대표가 있었다. 그는 친박계 후보들이 대거 공천되고, 보복성으로 밀려난 비박계 의원들을 구제하기 위해 ‘옥새 파동’을 감행하며 일부 지역구를 사수했다. 지난해부터 ‘국민경선’을 주장하며 공천권을 국민에게 돌려줘야 한다고 줄기차게 주장했던 그의 목소리는 이한구 공천관리위원장의 청와대발 칼부림에 흔적 없이 흩어졌다. 보복성 공천에 대해서라면 김 대표 그 자신이 누구보다 폐해를 잘 알고 있던 터. 그는 18대, 19대 총선을 앞두고 벌어진 공천 파동에서 자의적 전략공천의 피해를 몸소 겪은 당사자였다. 여기서 특기할 점은 18대 총선 당시 친이계에 밀려난 친박계 의원들을 중심으로 구성된 ‘친박연대’에 김무성 대표는 가담하지 않고 무소속으로 출마한 일로, 한나라당 후보를 꺾고 당선 후 가진 언론 인터뷰에서 “당을 만들면 한나라당과 멀어진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한나라당의 주인입니다”고 소회를 밝혀 눈길을 끌었다. 그는 애초부터 당선되면 한나라당으로 돌아갈 마음이었기에 당을 만들면 한 발짝 멀어지게 되고, 그렇게 되면 돌아가기 힘들다는 생각에 무소속으로 출마했다고 밝혀 실리 못지않게 명분을 중요시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번 20대 총선의 공천학살에 반발, 무소속 출마 후 추후 당선 시 복당 의사를 밝힌 후보들의 발언을 놓고 원유철 원내대표가 불가 입장을 밝힌 것과 대비되게 김무성 대표는 “아직 말할 단계 아니다”며 유보하는 입장을 시사했다.


총선 칼바람 뚫고, 용꿈 향해 튀는 '옥새사나이' 김영삼 전 대통령의 유세현장에 동행한 김무성 대표, 사진 = 김무성 의원 홈페이지



“아버지는 나에게 ‘정치는 우리 같은 사람들이 하는 게 아니다’라고 했지만 나는 그래도 YS를 따라다녔다.” - 2013. 5. 25 동아일보 기사 중


대학에서 경영학을 공부한 김 대표는 26세에 동해제강의 상무로, 32세엔 삼동산업의 사장으로 일하며 경영자의 길을 착실히 걷던 2세 경영인이었다. 김 대표의 부친 김용주는 1950년대 10대 기업으로 성장한 전남방직의 설립자로 이후 정계에 진출, 1960년 장면정권에서 민주당 원내대표를 지낸 인물로 5·16쿠데타로 의원생활을 마감, 이후 군사정권 당시 정권의 조사를 받고 나와 자녀들에게 절대 정치는 하지 말 것을 당부했다고 한다. 김무성 대표는 이런 부친의 당부를 거스르고 1985년 민주화추진협의회 창립에 참여, 1987년 통일민주당의 창당 발기인으로 이름을 올리며 정계에 입문해 상도동계의 일원이 됐다. 그가 경영인으로서의 삶을 등지고 정치에 발 디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총선 칼바람 뚫고, 용꿈 향해 튀는 '옥새사나이' 유년시절 어머니와 시장에서 마주한 거지를 보고 정치를 꿈꿨다는 그의 회고는 진정성 논란에 휩싸이기도 했다. 사진은 손녀와 함께한 김무성 대표, 사진 = 김무성 의원 페이스북



“고생하는 거지 위해 정계 입문했다.” - 2016. 4. 3 부산 국제시장 유세


지난 3월 25일 발표된 고위공직자 재산변동 신고에서 김무성 대표는 138억 894만 원을 신고했다. 배우자 명의의 예금만 100억이 넘는 것으로 알려져 화제를 모았는데, 재벌가 자제로 알려진 자신의 배경을 의식한 듯 그는 재벌에 대해 양면적 입장을 지속적으로 표명해오고 있다. 지난 2015년 9월 국회 교섭단체 대표연설에서 롯데가(家)의 경영 승계 다툼을 언급하며 “후진적인 지배구조와 시장지배력 남용, 불공정거래를 통해 불법, 편법으로 부를 쌓는 재벌들의 행위가 용납돼서는 안 된다”고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나 이내 “재벌개혁이 반기업정책으로 변질돼 일자리를 만들고 경제가 성장하도록 하는 기업의 발목을 잡는 것은 자제해야 한다”고 단서를 달며 수위를 조절했다. 지난 3일 부산 국제시장 유세에서 김 대표는 자신의 정계입문계기를 ‘거지를 위해서’였다고 밝힌 바 있다. 유년시절 모친과 국제시장을 찾은 김 대표는 바나나를 하나 사 먹었는데, 다 먹고 껍질을 바닥에 버리자 거지가 와서 집어먹었다며 어머니에게 왜 거지가 많냐 물으니 ‘정치를 못 해서 그렇다’는 답을 들었었다고. 그때부터 고생하는 거지들을 위해서 정치하기로 마음먹고 지금까지 오게 됐다는 그의 고백에 네티즌은 황당하다는 반응을 쏟아냈다.


총선 칼바람 뚫고, 용꿈 향해 튀는 '옥새사나이' 사진 = 아시아경제 DB



“인생의 좋은 경험이다 생각하고 하여튼 열심히 해야지 방법이 없습니다.” - 2014. 12. 26 여의도연구원 주최 청춘 무대 행사 중


헬조선이란 말을 쏟아내는 청년이 이해되지 않고, 실업률이 올라가는 이면에는 쉬운 일만 찾는 청년들의 눈높이에도 문제가 있으며, 알바비를 제때 못 받고 부당한 대우를 받을 땐 이마저도 좋은 경험이라 생각하라는 그의 발언 면면을 곱씹어보면 김 대표의 성장배경과 함께 성공가도만을 달려온 인물이 평범한 대중을 상대로 공감능력이 결여된 인상을 지울 수 없다. 드라마 ‘미생’의 장그래에겐 공감하지만, 신림동 고시촌 학생들의 목소리는 오래전부터 계획한 방해세력의 음모로 인식한다. 복지가 과잉되면 국민이 나태해지며 무상급식을 시행하면 아이들이 학교에서 공짜로 주는 밥은 안 먹게 된다는 발언까지 이르고 나면 집권여당의 대표이자 차기 대권 후보로 거론되는 인물의 사회인식에 대한 걱정과 우려가 앞설 지경이다. 지역구에서의 압도적인 지지율로 사실상 6선 고지가 확정된 그의 목표는 20대 총선 당선 너머에 있다. 김 대표 자신도 그러한 야망을 숨기지 않는다. 그러나 바닥에 떨어진 바나나를 먹던 거지를 향해 가졌던 연민과 동정의 마음이 왜 동시대의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들에게까지는 미치지 않는 것일까. 입장과 신념은 돌이 아니라 물처럼 바꿔서라도 기어이 원하는 목표를 쟁취하는 집념이 왜 민생법안으로는 향하지 않았던 것일까. “나더러 어디 있었냐고 묻는다면 어쩌다 보니 그렇게 돼서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던 파블로 네루다의 망각이 그의 행보 위에 드리워진 것일까. 이번 20대 국회로 정치를 그만두겠다는 그의 남은 정치인생에 적어도 30시간은 넘게 지킬 수 있는, 그리고 모두가 기억할 수 있는 감동의 정치는 없는 것인지 선거를 목전에 두고 되묻고 싶다.




김희윤 작가 film4h@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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