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오진희 기자] 제주의 검은 돌, 우윳빛 달항아리, 붉은 산수화. 3인 3색의 그룹 회화전이 다음 달 중순께 열린다. '현·백·홍(玄 · 白 · 紅)'전이다.
붉은색으로 분단된 우리 산하를 그려 ‘붉은 산수’의 작가로 불리는 이세현 작가, 소박하지만 극도로 세련된 우리나라의 백자 달항아리를 통해 절제의 미와 정신의 힘을 강조하는 최영욱 작가, 먹을 사용해 수행하듯 제주도의 검은 현무암을 그리는 최준근 작가가 함께 전시를 연다.
홍익대 서양화과 동기이며 젊은 시절 추억을 함께 했던 이세현, 최영욱, 최준근 세 작가는 30년 가까이 치열하게 자신의 길을 걸어왔다. 각자의 자리에서 자신만의 이야기를 풀어왔던 세 작가가 이번 전시를 통해 한 공간에서 조우한다.
세 작가 각각의 대표하는 색으로 붉은 산수화, 백색의 달항아리, 제주도의 검은 돌을 표현해 전시장은 세 가지 한국적인 색으로 물들 예정이다.
이세현 작가는 붉은 산수화를 통해 동양적인 감성을 담아내며 해외시장에서 주목을 받고 있다. 'Between Red' 연작은 붉은 색조 안에 전통적인 동양화의 시점과 서양의 원근법을 결합하여 이미지를 재구성했다. 왜 붉은 색인가? "동양이 추구한 최고의 아름다운 경지인 산수를 인간의 잔혹함과 억압으로 읽어냈다. 인간의 폭력적 시선을 가감 없이 드러내고, 자연에 각인된 역사의 상처를 직설적으로 보여주며 인간과 자연의 상처를 모두 아우르고자 했다." 그의 산수는 실제로는 다시점을 취하는 서양식 묘사를 통해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이상적인 풍경을 표현하고 있다.
최영욱 작가는 조선의 백자 달항아리를 그리고 있다. 그의 작업은 일종의 수행과도 같다. 캔버스에 유백색 혹은 다양한 뉘앙스의 흰색으로 여러 번에 걸쳐 바탕을 칠하고, 그렇게 조성된 바탕 위에 약간 도드라지게 달항아리의 형태를 만든 다음 그 안에 무수한 실선을 그어 빙열을 표현한다. 직접 달항아리를 마주하는 것처럼 극사실회화로 느껴진다. 가까이에서 마주하면 표면의 얇을 균열들을 발견할 수 있는데 이는 작가가 생각하는 삶의 운명, 업, 연(緣)을 실선으로 연결시키는 행위를 통한 인간의 생을 비유한 것이다. 작품명 '카르마(Karma)'의 의미가 그렇듯 갈라지면서 이어지듯 만났다 헤어지며, 비슷하면서도 다르고 다른 듯 하나로 조화되는 우리의 인생길을 선으로서 밀도 있게 표현하고 있다.
최준근 작가는 캔버스 천위에 표면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흰 물감을 수십 번 칠하고 갈아내는 작업을 반복한다. 그 위에 세필에 먹을 묻혀 검은 제주도 돌을 그린다. 화면은 깊이를 가질 수 없는 단순한 여백으로 남아있고 검은 돌들은 먹의 검은색만
이 사용됐다.
제주도에는 흔히 구멍이 숭숭 뚫린 현무암들을 쉽게 만나볼 수 있다. 그런데 최 작가의 그림에 담긴 돌은 좀 특별하다. 제주 지역에서도 어느 한 곳에만 볼 수 있는 네모나 세모꼴 형태의 각이진 돌들이 주로 보인다. 바탕의 하얀색에서 느껴지는 팽팽하게 균형 잡힌 긴장감과 절제, 멀리서 보면 점들로 보이는 돌들. 생성과 소멸에 대한 끝없는 성찰의 결과물이 순백의 무한한 화면 위에 펼쳐진다.
전시는 다음달 12일부터 6월 9일까지. 서울 성북구 성북로 아트스페이스벤 02-742-0788.
오진희 기자 valere@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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