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이상국 기자]전국노래자랑은 1980년에 시작해 35년의 역사를 지닌 초장수 프로그램이다. 이 프로그램이 이토록 생명력을 지닌 것은 참여자들이 만들어내는 다채로운 새로움 때문이 아닐까 한다. 형식은 단조롭지만 늘 새롭게 무대로 올라오는 설레는 표정과 몸짓들이 있어 자생적으로 긴장감이 생겨난다. 텔레비전에 얼굴을 내밀고 싶은 욕망과, 그 욕망을 그다지 가공하지 않은 채로 노출시켜 볼거리로 만들어내려는 방송의 취지가 딱 맞아떨어져, 프로그램을 ‘생물’로 만들어냈다. 이 ‘전노자’의 미덕을 짚어보는 일은, 이 사회의 결핍과 욕구를 읽어내는 흥미로운 작업일 수 있다. 우선 가장 중요한 미덕은 이미, 그 프로그램의 제목이 제시하고 있다.
첫째는 ‘전국’의 미덕이다. 이 프로는 전국을 돌아다닌다. 대한민국은 동서남해에 이어 ‘송해’라는 넓은 바다 때문에 4면이 바다라는 칭송을 듣는, 사회자 송해선생은 그야말로 89세의 나이를 잊은 4500만의 오빠가 되었다. 정치가 전국을 누비며 그 악수의 온기로 민심을 끌어내듯, 전노자의 송해는 특유의 친화력으로 숨은 신명의 바닥을 훑는 위대한 마당발로 기능한다. 전국을 순회한다는 프로그램의 기틀은, 이것이 국민의 화합이라는 거룩한 공익적 목표를 겨냥하고 있다는 만족감을 공유하게 한다. 전노자는 정치적으로 소외된 지역까지를 감싸 안는 강력한 접합제이다. 전노자에서는 지역감정도 없고 지역이기주의도 없다. 어디든 인간이 숨쉬는 곳임을 전노자는 매주 웅변해준다.
둘째는 ‘노래’의 미덕이다. 중국인들이 우리의 옛조상을 일컬어 가무를 좋아하는 민족이라고 촌평했지만, 전국노래자랑은 그걸 증명해준다. 이 프로를 보노라면 우리의 보편과 평균 속에 감춰진 뿌리깊은 끼와 신명을 느낀다. 노래는 우리가 일상에서 전략으로 채택하고 있는 점잔과 가식과 시늉을 잠시 접게 만드는 힘이 있는 듯 하다. 노래에 취해 튀어나오는 뜻밖의 인간적인 면모들이 이 프로그램을 강력하게 만든다. 노래는 우리를 아이같은 소박한 즐거움으로 환원시키고 우리의 삶의 고통을 일시정지시킨다. 계급도 사라지고 성별도 사라지며 나이도 별 의미가 없다.
세번째, ‘자랑’의 미덕이다. 자랑은 프로의 행위가 아니다. 프로는 자랑하는 사람이 아니라 솜씨를 파는 사람이다. 자랑은 유통의 개념이 아니라, 놀이에 가깝다. 참여자들은 저마다 놀러 나왔다. 물론 자랑은 한 자아가 사회에서 공인받으려는 욕망의 한 형태이다. 놀이와 욕망이 결합해서 다채로운 인간풍경을 만들어내는 게 전노자의 콘텐트이다. 자랑은 아주 잘할 필요는 없다. 잘하면야 나쁘진 않지만 그런 사람들은 프로그램 중간중간에 초대가수로 나온다. 주위에서 좀 논다고 말해주던데,하는 기분으로 나오면 그만이다. 땡과 딩동댕이 있지만 운만 좋으면 박자를 안놓쳐서 딩동댕까지 갈 수 있다. 프로에 주눅들지 않아도 되고, 실력이 특별하지 않아도 된다. 전국을 돌아다니는 프로이긴 하지만, 프로 하나하나는 그 지역 사람들이 경쟁자이다. 그러니 부담도 크지 않다.
그 외에도 이 프로의 미덕은 많다. 지역의 애향심을 돋우는 것도 이 프로의 큰 미덕이다. 특히 지자체는 전노자의 조명이 스스로의 지역으로 오는 일이 반갑기 짝이 없다. 전국을 대상으로 지역을 홍보해서 지역의 특산품이나 관광상품을 소개할 찬스이기도 하다.전국적으로 보자면, 한 지역을 관심있게 들여다 보고 이해하게 하는 소통 창구의 역할도 하는 셈이다.
다섯 째는 지역 구석구석의 숨은 끼들을 찾아내서 전국적인 스타로 만드는 인재발굴의 역할을 맡기도 한다는 점이다. 전노자가 없었더라면 볼 수 없었을 100세 노인의 신명이나 4살바기의 기특한 재롱을 우리는 리모컨만 들면 볼 수가 있다. 특이한 춤과 얄궂은 표정, 기상천외의 복장과 천방지축의 말투도, 무가공으로 서비스된다. 삶 자체가 지역 특산품이라는 생각을, 이 프로를 보면 절로 느끼게 된다. 지역 특산품이 전국화되는 창구가 바로, 전노자이다.
여섯 째 미덕은 트로트라는 장르를 지탱하는 배후로 전노자가 착실하게 기능한다는 점이다. 올해의 결선 ‘자랑’에선 우리나라에서 내로라 하는 트로트 가수가 다 나왔다. 최근 가요의 주요 수용자에서 소외된 트로트 소비자들이 적어도 이 무대에서만큼은 기승과 극성을 부린다. 트로트는 결코 죽지 않았음을, 오히려 방방곡곡에서 깊숙이 소비되고 있음을, 전노자가 증명해준다.
일곱 째 미덕은 국민엔돌핀을 솟아나게 하는 일이다. 보는 이의 즐거움을 위해 기꺼이 자기 스타일을 구기는, 소박한 엔터테이너 기질들이, 시청자들을 속없이 웃게 한다. 자기 속에 들어있는 순수하고 낙천적인 본성을 되돌아보는 때도 이 때다. 파안대소 속에서 문득 삶의 대긍정을 깨닫기도 한다. ‘노래는 우리 속에 깃든 자연산 100%의 고운 심성이 흘러나오는 샘물이며 우주의 결과 맞추는 화음’이라는 똘강 이백천 선생의 말씀 그대로다.
여덟 째는 세대 간의 단절과 불화를 뛰어넘어 함께 웃고 즐기게 하고, 소통의 가능성을 살짝 보여준다. 전노자에서는 나이는 그저 숫자일 뿐이다. 할머니와 손자가 노래하고 춤춰도 어색하지 않고 어린 딸이 노래하고 아버지와 삼촌이 쌩쇼를 해도 남세스럽지 않다. 나이보다 중요한 것이, 이 프로그램에는 있다. 그것은 표현하고자 하는 본능이다. 그 본능은 결코 세월에 지배되지 않는 듯 하다.
아홉 째, 서른 몇 해를 지나오면서 이 프로의 처음에 섰던 사람들은 이미 고인이 되기도 하고 어린이가 장년이 되기도 했다. 대한민국의 ‘노출’에 대한 대중수용도를 연구하려면 전노자를 분석해보는 게 바람직할 지 모른다. 십년 전 이 프로그램에서 대중이 납득하던 노출의 수위와 지금의 수위를 비교해보는 일은 흥미로울 것이다. 노출 뿐 아니라, 성적인 농담과 몸짓, 혹은 발언과 사고의 경직성이 어떻게 변모되어 왔는지도 이 프로그램은 정밀하게 담아내고 있다. 전노자는 이 사회의 성의식과 도덕적 사유의 틀의 변화를 보여주는 바로미터라는 얘기다.
열 번 째. 어쩌면 이것이 가장 중요할 지도 모른다. 이 프로는 촌스러움이 무기다. 사회의 기층(基層) 문화를 담아내서 소외감을 해소하는 기능을 한다. 방송의 많은 다른 프로들이 지나쳐버리는 그 대상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고 그 쑥스런 장기에 기꺼이 박수를 쳐준다. 이것은 어쩌면 이 사회의 수많은 봉사활동과 함께 그들에게 실질적이고 의미있는 위안일지 모른다. 노래는 그들의 고독과 고단과 고민과 상심을 치유하는 특급 처방이다.
이상국 기자 isomis@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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