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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진석의 책과 저자] 권력이 된 문단, 비워서 채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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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상우 시인이 이끄는 <무크 파란> 창간호의 문학실험

[허진석의 책과 저자] 권력이 된 문단, 비워서 채운다 무크 파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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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숙이 남의 글을 훔쳐다 제 글에 옮겨 심었음은 거의 다 들통 났다. 그래도 나는 내 서가에 꽂힌 그의 책을 내다 버리지 않는다. 시원하게 "맞다, 내가 그랬다"고 하면 좋았겠지만 아무 말 안 해도 그만이다. 신경숙은 "나도 내 기억을 못 믿겠다"고 알츠하이머 질환으로 고통 받는 환자가 반짝 정신이 들었을 때나 할 법한 고백을 했다. 이 지경까지 몰렸으니 욕 많이 보았다. "무슨 사과를 그따위로 하느냐"는 비판도 있었다. 세상에는 신경숙처럼 말하는 사람이 많다.


신경숙은 글을 참 잘 쓴다. 1993년 초여름에 '풍금이 있던 자리'를 읽었는데, 반 페이지쯤 읽자 그의 재능을 체감할 수 있었다. 신경숙은 미시마 유키오의 글을 훔쳐다 썼다. 미시마라는 자는 일본의 극우분자인데, 자위대 건물에 들어가 평화헌법을 뒤엎어야 한다는 연설을 한 뒤 할복했다. 영화 속의 사무라이처럼 멋지게 죽음을 맞고 싶었겠지만 여기저기 피를 묻히고 동료에게 수고를 끼쳐가며 추잡하게 목숨을 놓았다. 글 잘 쓰는 여성이 그딴 놈 글 좀 갖다 쓴 게 대수인가. 훔친 솜씨도 눈이 부시다. 아주 딱 맞는 자리, 거기 아니면 들어갈 곳이 달리 없는 그 구멍에 딱 갖다 끼웠다.

신경숙의 글 도둑질은 뜻하지 않게 우리 문단 내지 문화 부문의 권력이라는 문제를 소환했다. '뜻하지 않게'라고 했지만 나는 신경숙의 도둑질을 적발하고 고발하며 비판의 소재로 삼는 과정에 권력에 대한 갈증과 결핍이 원인으로 작용했다고 본다. 그 과정이 모양 사나웠다. 소설가의 남편이 불려나오고, 선생도 불려나왔다. 문학 권력? 그게 뭐가 문제이며 비판을 받아야 할 이유가 되나? 인간의 모여살기는 반드시 권력을 자생케 한다. 아니, 모여살기는 권력을 전제로 한다. 그 구성원이나 구성원이 되려는 자의 선택은 두 가지다. 권력에 순응하고 활용하거나 저항하고 도태되거나. 글을 쓰는 자에게 문학잡지 한 권은 그 자체로서 권력의 표상이다.


[허진석의 책과 저자] 권력이 된 문단, 비워서 채운다 채상우 시인

표절 소란이 잦아들고 내 기억에서도 어지간히 지워졌을 무렵, 그러니까 지난 주 목요일에 시인 채상우(42)가 책 한 권을 보냈다. 그가 대장이 되어 창간한 <무크 파란>. 엄청나게 두꺼웠다. 다 합쳐 596쪽인데 시인 아흔여섯 명이 쓴 시와 에세이만 실었다. 소설이나 평론 따위는 없다. 시인 한 명이 여섯 쪽에 글을 실었다. 시인에 대한 간략한 소개 한 쪽, 시 두 편, 에세이 한 편이다. 증류수와도 같은 시 정신, 순수에 대한 지향이 느껴지지만 사실 착각이다. 타오르는 야망과 권력 의지를 발견하지 못한다면 눈치 없는 사람이다.

채상우에게 시인들을 끌어 모은 과정과 기준을 물었다. "기획위원 열한 명이(보라, 벌써 패를 짰다. 조직은 권력의 다른 이름이다) '현재의 한국 시단을 대표할 수 있을 시인'들을 가려 뽑되 1990년 이후에 등단한 시인들로 제한하였다. 지난 25년 동안 등단한 시인들을 대상으로 향후 25년을 내다보자는 취지에서였다." 시인을 가려 글을 맡기고 그걸 모아서 편집하는 과정, 그것이 바로 문학 잡지가 권력의 표상으로서 작동하는 방식이다. 독자를 위해 책을 찍어낸다는 말은 대개 거짓말이다. 테니스 선수가 벽에 대고 공을 쳐서 다음 스트로크를 할 수 있는 탄력을 확보하듯, 시인 작가는 독자를 세워 놓고 비슷한 행동을 한다.


'자살골' 같은 주장도 한다. 채상우는 "현재 문학 관련 출판인들과 편집 위원들은 반성해야 한다. 독자와 정말 소통하고자 하는가. 오로지 문인들 혹은 출판사를 위해 잡지를 발간하고 있지 않은가. 문학을, 시를 전해 주기보다 권력을 유지하고 행사하기 위한 장치로 활용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안됐지만 <무크 파란>도 분명 문인과 출판사를 위해, 권력을 유지하고 행사하는 장치로 활용될 운명이다. 수록 시인 선정이라는 과정을 통해 편집 위원들은 권력을 행사했다. 무크가 잘 된다면 권력도 유지된다. 그리고 건강한 권력은 죄악이 아니다.


채상우는 2003년에 등단한 젊은 시인이다. 그의 내면에서 자기 검열이 작동하는 것 같다. 성감대가 어디인지 들키지 않으려고 노력하듯 생각에 생각을 거듭 얹어 내놓는다. 거기 냉철한 시 정신이 새싹처럼 돋는다. "독자가 진정 읽고 싶은 것은 '난독증'을 불러일으키는 저 화려한 비평 용어나 득의만만한 귀족어가 아니라 시인들의 맨 살갗인 그 시뿐이 아닐까. 그리고 창비와 문지와 실천문학 같은 한 시대의 잡지들로부터 배워야 할 것이 있다면, 그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알았고 오로지 그것만을 실행했다는 점이다."


새로운 매체의 등장은, 경쟁 분야에서 어떤 방식으로든 긴장을 만들어낸다. 신문에는 몇 줄 나오지도 않았지만 문단은 이미 그 존재를 인지했으리라. 다음 행보가 궁금하다. 채상우는 무크를 내는 ㈜파란의 대표이사다. <무크 파란>은 한 해에 두 번 나온다. <계간 파란>을 내년 봄호부터 내고 시집도 찍어낼 생각이다. 시집을 낼 때는 기획 위원을 두어 시인과 시집에 대해 논의하겠다고 한다. '시인과 함께하고자 하는 의미'라지만 듣기 좋은 이야기고, 시집 원고를 자기들이 정한 '수준'에 맞게 손보겠다는 소리다. ㈜파란의 시집은 유명 성형외과 현관에서 쏟아져 나오는 미인들처럼 닮아 있을지 모른다.


<무크 파란>은 문단과 시장을 향해 쏘아올린 예광탄 같다. 나는 이 인쇄물 앞에서 기대와 불쾌감을 함께 느낀다. 나의 불쾌감은 로깡댕의 구토와 같다. ㈜ 파란에 원고를 맡기고 싶지 않다. (파란 역시 내 원고 따위는 필요하지 않으리라) 나는 후원금이나 집어넣고 이들의 무크와 잡지와 시집을 기다리면 그만이다. 그러나 채상우의 젊은 토로는 인내와 기대를 함께 요구한다. "우리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일,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안다. 그것은 바로 시를 쓰고, 시로써 스스로를 개진하고, 이 세계를 새로운 방식으로 꿈꾸고, 시를 읽고 밤을 새워 토론하는 것이다." huhba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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