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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리더십]플루 덮친 곳 지원…메르스와 맞짱 '센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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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파스퇴르연구소 호흡기 바이러스 연구팀 민지영 박사

[아시아경제 지연진 기자]'센 언니'. 한국파스퇴르연구소 호흡기 바이러스 연구팀 민지영 박사(41)는 종종 이런 오해를 산다.


민 박사는 솔직한 성격이다. 그래서 에둘러 표현하지 않는다. 직설화법이 그의 매력이다. 미국에서 석박사 과정을 밟고, 미국 최대 질병연구기관인 국립보건원(NIH)에서 배운 표현 방식이지만 종종 '(성격이) 센 언니'라는 말을 듣는다.

그는 알고보면 아들의 이유식을 만들면서 보람을 느끼고 '좋은 엄마'를 꿈꾸는 시쳇말로 '여자여자한' 엄마다. 민 박사는 2011년 한국파스퇴르연구소에 입사했다. 호흡기 바이러스 연구팀은 이때 생겼다. 민 박사는 요즘 중동호흡기증후군(MERSㆍ메르스) 치료제를 개발 중이라고 했다. 그는 "한국 과학자로서 호흡기 바이러스 분야에서 혁신적인 치료물질을 개발하는데 도움이 됐으면 좋겠다"고 했다.

[W리더십]플루 덮친 곳 지원…메르스와 맞짱 '센언니' 민지영 한국파스퇴르연구소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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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 과학 선생님에서 호흡기 바이러스 전문가로 =민 박사는 대학교를 졸업한 뒤 중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생물학과 대학교수인 아버지의 영향으로 생물학을 전공했고, 교사인 어머니의 뜻에 따라 과학 선생님으로 교단에 섰다.

 하지만 교직생활 1년 만에 모든 것을 포기하고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교사는 정년까지 안정된 생활을 보장하지만, 똑같은 수업을 수십년간 반복할 자신이 없었다.


 초기 미국 생활은 여느 유학생과 마찬가지로 힘들었다. "콜라 주세요"를 달달 외운 뒤 음식을 주문하는 등 언어의 장벽도 높았지만, 외환위기 당시 유학생활을 시작한 탓에 치솟는 환율을 감당하기 어려웠다.


 공부 욕심이 컸던 민 박사는 장학금을 받기 위해 치열하게 공부했고, 이를 인정받아 미국의 3대 인플루엔자 권위자인 '로버트 크룩' 교수의 연구실에 남게됐다. 베트남에서 고병원성 조류독감인 'H5N1'이 처음 창궐했던 시기였다. 민 박사는 이곳에서 박사 후 과정을 밟는 동안 평생의 경력이 된 인플루엔자 연구에 매진했다.


 연구 이외 미국식 행동양식도 훈련받았다. 겸손과 과묵을 미덕으로 여기는 아시아 성향을 버리고 송곳 질문과 맞장 토론을 서슴치 않는 여학생으로 다시 태어나라는 주문이었다.


 민 박사는 "교수님께서는 저를 '졸업할 때 아시아의 성향을 탈피하고 아메리칸 걸(미국여성)로 만드는 것이 목표라고 말할 정도로 수줍어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면서 "처음에는 쉽지 않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적응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민 박사가 교정을 떠나 국립보건원으로 자리를 옮긴 것은 그동안 매진했던 기초학문을 실제 환자에게 적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국립보건원이 위치한 미국 매릴랜드에는 존스 홉킨스병원은 물론 제약사까지 있어 연구 성과를 바로 확인할 수 있다.


 민 박사가 2009년 국립보건원에서 전임상(동물실험)까지 끝낸 H7형 조류독감 백신은 지금까지 요긴하게 사용되고 있다.


 그는 한국을 떠날 때처럼 안정된 미국 직장을 또 한번 포기하고 한국행을 선택했다.


 신종플루를 비롯해 인플루엔자가 아시아에서 창궐하면서 이를 지근거리에서 다뤄보고 싶다는 욕심이 그를 귀국하게 만들었다.

[W리더십]플루 덮친 곳 지원…메르스와 맞짱 '센언니' 민지영 한국파스퇴르연구소 박사


 ◆임신 중 바이러스 실험..'임신은 병이 아니다' = 민 박사는 박사 졸업 논문을 준비하던 중 아들을 낳았다. 출산 직전까지 실험실에서 감염병 바이러스를 다뤘다.


 민 박사는 "미국에선 '임신은 질병이 아니다(Pregnant is not a diseas)'라는 인식이 많기 때문에 임신기간을 위한 특수훈련을 받고 실험을 계속했다"면서 "입덧도 없고 임신 8개월까지 표시도 안 나는 순한 아이 덕분에 순조롭게 연구를 계속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출산 이후에는 다른 워킹맘과 마찬가지로 여러 편의 드라마를 찍었다. 갓 태어난 아기를 차마 데이케어(Daycare, 일종의 어린이집)에 둘 수 없어 한국의 친정엄마에게 맡기고 3개월을 아들 사진만 들여다보며 눈물을 쏟기고 했다.


 민 박사는 퇴근 후 아이를 돌보고 아이가 잠이 들면 그때 논문을 썼다. 민 박사의 졸업논문 특별 감사란에는 '아들에게 고맙다'라는 문구가 담겼다.


 민 박사는 요리를 즐긴다. 석박사 과정을 밟은 미국 텍사스주 오스틴은 한국인들이 많이 살지 않아 김치도 직접 담가 먹어야 했다. 요리의 레시피와 실험의 프로토콜(실험방법)이 일맥상통한 점이 민 박사의 요리 실력에 기여했다.


 민 박사는 "김치 뿐만 아니라 만두도 빚고 아이의 이유식까지 직접 만들어 먹였다"고 했다.


 한국과 미국의 직장생활은 다소 차이가 있지만 남녀차별에선 별반 다르지 않다. 미국에서도 출산과 육아는 오롯히 여성의 몫이며 유리천장을 경험했다고 했다.


 민 박사는 "자기 분야의 일을 잘하고 이것이 쌓이다 보면 결국 (천장에 오를수 있는) 사다리가 된다"며 "이런 사다리가 많아지면 천장까지 오르는 길이 좀더 쉬워지지 않겠느냐"고 반문했다.




지연진 기자 gyj@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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