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1위 부동산 경매정보업체 지지옥션 회장 이야기
'내 사업' 열망에 곤로공장 인수 덜컥 뛰어들어 3억원 빚 남고 파산
대학학보사 경험 "정보신문 해볼까" 법원서 물건 열람대장 베끼기 반복
계약과 경제 압축해 브랜드 '지지'로 "난 부동산업자 아닌 IT전문가요"
강명주 지지옥션 회장.
[아시아경제 주상돈 기자] "사람들이 나를 만나면 경매로 좋은 집 하나 사달라고 해. 날 부동산업자라고 생각하는 거지(웃음). 하지만 난 정보기술(IT)업자야. 정보 제공 대상이 부동산 경매이다 보니 부동산 전문가가 돼버린 거지. 다시 말하지만 난 경매 정보를 제공하는 IT업자야."
강명주 지지옥션 회장은 자타공인 부동산 경매 전문가다. 그는 월 매출 수억원에 달하는 국내 1위 경매 정보업체 지지옥션을 30여년째 이끌고 있다. 2010년부터는 사업 영역을 확장해 경ㆍ공매 부동산펀드를 주력으로 하는 지지자산운용도 세웠다.
그가 처음부터 경매 정보업체 운영을 꿈꿨던 것은 아니다. 유년 시절엔 작은 목장을 하고 싶었고 대학교 시절에는 학보사에 몸담았다. 대학교 졸업 직후에는 막연히 사업이 하고 싶어 석유 곤로사업도 했었다.
"내 인생은 그야말로 우왕좌왕이었다. 부모에게 뭐라도 물려받았으면 한길로 전통을 이어갔을 텐데 그런 게 아니라 스스로 개척한 거라 이것도 해보고 저것도 해보다가 된거지."
그는 이런 젊은 시절의 우왕좌왕이 지금의 지지옥션을 만들었다고 했다. 지지옥션의 성공요인으로 꼽은 '정보 질 제일주의'와 '무광고ㆍ선불제' 원칙을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세울 수 있었다고 했다.
강 회장은 굶는 것이 다반사일 정도로 가난한 유년 시절을 보냈다. 아버지는 그가 7살이던 한국전쟁이 시작된 해 여의었다. 어머니 홀로 미역과 꽁치, 오징어 등을 말리고 손질해 받은 품삯으로 생계를 이어나갔다. 작은 목장이라도 하면 배는 곯지 않겠다는 생각에 목장주인을 꿈꿨다. 선생님의 권유로 상경해 영락교회가 운영하는 영락상고 2학년에 편입했다. 과일과 껌을 팔아 학비를 대야 했던 그는 졸업장을 따는 데 5년이나 걸렸다. 졸업장만 딸 요량이었으니 공부는 뒷전이었다. 그는 반에서 뒤에서 두 번째일 정도로 성적이 좋지 않았다. 그런데 아이큐 테스트가 그의 인생을 바꿔놓았다.
"시험 본 학생들 중에 꼴찌였던 아이가 IQ테스트에서 140이 나온거야. 전교 1등이었어. 교장 선생님이 담임 보고 '사연을 한번 알아보라'고 했지."
당시 담임 선생님은 이때부터 강 회장을 직접 지도하기 시작했다. 목장 주인을 꿈꾸던 그는 1년 만에 고려대 축산과에 합격했다. 축산과에 입학했지만 또 공부는 뒷전이었다. 대신 대학교 시절엔 학보사에서 시사만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군 복무기간을 빼고 대학 졸업 후 학보사 간사를 한 1년을 포함해 약 6년간 매주 1편씩 총 200회의 만평을 그렸다.
대학원까지 졸업한 그는 막연히 '내 사업'이 하고 싶어졌다. 지인과 함께 서울 광진구 화양동에 있는 석유곤로 공장에서 '딱딱'거리며 쇠가 부러지는 소리를 듣고는 "이게 바로 사업"이라는 생각에 덜컥 인수를 결정했다.
"쇳소리 듣고는 미쳤던 거야. 석유곤로에 대해선 아무것도 모르지. 게다가 망해가는 공장이지. 사업을 해야겠다는 생각에 욕심만 앞섰던 거지."
역시 실패했다. 트럭 한 대 분량(200여개)을 팔면 100개가 반품됐다. 부품을 납품받아 조립해 팔았는데 부품 중 불량이 많았다. 부품이 100여개가 들어간다는 것도 이때 알았을 정도니 부품 성능을 따질 능력은 당연히 없었다. 여기에 1973년 석유파동까지 겹치면서 부도를 맞았다. 사용권을 팔 수 있는 '청색전화'까지 팔고서도 당시 돈으로 3억원 정도 빚이 남았다.
차비가 없어 고향에도 못 가고, 방황하던 그는 학보사 시절이 떠올랐다. 신문을 만들고 싶었지만 일간지는 엄두가 안 났다. 대신 초기 자본이 들지 않는 정보 신문을 만들 생각을 하고 있던 찰나 지인으로부터 "경매 정보가 괜찮다"는 얘기를 듣고 '경매 신문'을 만들기로 마음먹었다.
서울중앙지법에서 하루 5~6시간씩 경매물건 열람대장을 베끼기 시작했다. "당신 그거 다 살 거 아니면 나가"라고 경매 계장이 소리치면 잠시 자리를 피했다가 다시 들어가 베끼기를 반복했다. 한 번에 한 물건 정보를 옮겨 적기도 힘들었다. 이렇게 해서 한 뼘 두께의 열람대장을 20페이지 분량으로 요약해 한국입찰경매정보라는 이름을 붙여 첫 '정보지'를 만들었다. 1994년 계약경제일보라는 이름으로 정식 등록했다. 계약과 경제라는 낱말에서 힌트를 얻어 나중에 지지(GG)옥션도 만들었다.
중구 필동 인근 인쇄소에서 100부를 찍어 법원에 가져갔다. 첫 경매물건 정보지에 대한 반응은 뜨거웠다. 금세 동이 났다. 다음번엔 200부를 찍었는데 소문이 돌았는지 사람들이 줄을 서서 정보지를 가져갔다. 이때부터 2000원에 팔았는데 없어서 못 팔 정도 였다.
"그땐 정말 신나서 베끼고 만들어서 달라는 대로 줬지. 후불제였는데 가까운 데는 배달하고 먼 데는 우편으로 보내고. 근데 수금이 안 되는 거야. 나중에 돈 떼이나 선불로 해서 사람들이 안 봐서 망하나 이판사판이라는 생각에 딱 선불제로 바꿨지. 사람들이 미쳤다고 했어."
성공이었다. 유일한 경매 정보지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은 여전했다. 몇 달치 구독료를 선불로 내고도 정보지를 보겠다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이때부터 강 회장은 정보지의 품질을 높이는 데 주력했다. 당시 열람대장 중에는 일부러 해당 물건 정보를 찢어버려 유찰시키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한 번 유찰되면 최저입찰가가 20%씩 떨어지기 때문에 고의적으로 물건 정보를 없앴던 것이다. 그는 우선 열람대장에 빠져있는 물건정보를 '누락정보'라는 이름으로 공개했다. 또 열람대장에는 없는 등기부등본과 지번도, 사진을 추가하기 시작했다. 곤로사업 실패를 통해 '성공의 관건은 질'이라는 신념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질을 높이기 위해 상상도 못할 일들을 했어. 한 사건 물건 정보를 좋게 하기 위해 그냥 베끼고 마는 것이 아니라 경매에 나오는 히스토리가 들어있는 등기부등본을 넣었지. 당시 등기는 해당 등기소에서만 뗄 수 있어서 제주, 철원, 영월 등 전국 각지에 가서 다 가서 떼어 넣었다고." 강 회장이 지금껏 고수하고 있는 '무광고 원칙'은 학보사 간사 시절 맡은 광고대행 업무 경험이 도움이 됐다. 쫓아다니며 광고를 받는 신문은 결국 광고주에 휘둘려 품질이 낮아질 수밖에 없다는 판단에서다.
"우리는 정보의 질을 높이기 위해 비용을 아끼지 않는다. 버는 돈 대부분은 질을 높이는 데 썼다. 정보는 값이 더 비싸다고 해서 옮기지 않는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는 불황 없는 경매시장도 성공 요인 중 하나라고 했다. 호황기에는 값이 오른다는 기대감으로 물건이 나오는 대로 사기 때문에 경쟁이 더 치열해지고, 불황기에는 물건은 많은데 살 사람이 없다 보니 또 투자하는 사람이 생긴다는 것이다.
직원 1명으로 시작했던 지지옥션을 본사직원 60여명, 정보요원 100여명 등의 규모로 성장시킨 그는 여전히 현업에서 활동 중이다. 학보사 시절 만평을 그리던 경험을 살려 이제는 경매를 주제로 만화를 그린다. 지난 15년간 한 편씩 한 주도 거르지 않고 지난 달 31일까지 총 775편을 그렸다. "지금도 월급을 떳떳하게 받아. 다른 사람이 못하니까. 만평 아니면 벌써 쫓겨났을 수도 있겠지(웃음). 정보는 베낄 수 있지만 만화는 못 베끼잖아."
주상돈 기자 do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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