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면을 먹는다. 뜨거운 라면을 국물에서 건져 올려 후후 불다가 한입 가득 빨아들인다. 후루룩. 시큼한 김치를 사각사각 씹는다. 입안에서 면발과 김치가 뒤섞인다. 내가 먹는 라면, 아니 내가 끓인 라면은 나만 먹는다. 아들도 딸도 아내도 좋아하지 않는다. 퉁퉁 불어 스프 분말의 찝찔하면서도 까끌까끌한 입자가 달라붙은 라면. 이 라면은 1960년대의 라면이다. 서른여섯에 낳은 외아들을 위해 끓인 내 어머니의 라면. 젓가락으로 찍어 들어 올리면 냄비째 번쩍 들리는 그런 라면이다. 그런 라면의 맛이다. 아무도 먹지 않을 그런 라면, 그런 맛.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눈물 나게 그리운 지상의 맛. 나는 왜 이런 라면을 먹는가.
라면을 후루룩거리며 텔레비전 채널을 돌린다. 여기저기서 먹고 있다. 온통 먹자판이다. 왕년의 수사반장 최불암씨는 범인 잡던 솜씨를 발휘해 전국에 흩어진 한국인의 밥상을 찾아내 숨은 맛을 들추고 있다. 여섯 시 내 고향의 어르신들도, 외딴 섬이나 깊은 산중에 홀로 사는 기인(奇人)도 리포터와 나란히 앉아 뭔가 먹는다. 한국으로 시집온 외국인 며느리의 친정에 간 시어머니와 사위도 먹는다. 군대체험 프로그램의 하이라이트는 부대 내 매점(PX) 같다. 지난겨울 만재도에서 유해진씨와 함께 지내며 요리 솜씨를 뽐낸 차승원씨는 다음 달에 다시 그 섬에 간다고 한다. 대한민국은 왜 이렇게 먹어대는가.
테살리아의 왕 에리식톤은 곡물의 신 데메테르가 아끼는 참나무에 손을 댔다가 저주를 받았다. 데메테르는 배고픔의 신 '리모스'를 에리식톤에게 보냈다. 리모스는 잠든 에리식톤의 혈관에 숨을 불어넣었다. 깨어난 에리식톤은 미친 듯이 음식을 탐한다. 무엇으로도 배를 채울 수 없다. 음식이 떨어지고 재산이 동났다. 딸까지 팔아 음식을 댔다. 마지막에는 제 몸을 뜯어 먹었다. 이빨만이 남아 딱딱거렸다. 리모스가 에리식톤에게 불어넣은 숨결은 '식욕'이 아니었으리라고 나는 믿는다. 그것은 참을 수 없는 공허가 아니었을까. 그리고 시대의 내장을 채우려는 듯한 우리들의 미친 식욕도.
채워지지 않는 공허, 메아리 없는 외침, 이해할 수 없는 죽음과 슬픔, 가난에 대한 천대, 고통에 대한 조롱, 오늘에 대한 체념과 내일에 대한 공포, 울분과 응어리…. 어떤 우울증은 폭식을 유발해서 약을 먹어야 낫는다. 내 주변에도 "스트레스가 심해 왕창 먹는다"는 동료가 있다. 그런 건가. 견딜 수 없는 두려움에 사로잡혔을 때 토끼는 제 새끼를 삼킨다. 하면, 먹어댐은 유일하고도 최종적인 파토스인가. 하지만 걱정스럽다. 다 먹어치우고, 슬픔도 분노도 응어리도 희망도 다 먹어치우고 우리 주변과 자신마저 다 먹어치우고 창백한 이빨만 남아 저 허황한 거리에 뒹굴게 되지 않을까.
그러나 음식이란, 그리고 무엇을 먹는 행위는 보다 절실하고 간절한 비나리가 아닌가. 불가의 수행자들은 공양을 하기 전에 기도한다. "이 공양은 어디에서 왔는가. 내 덕행으로는 받기 부끄럽네. 이 몸을 살리는 약으로 알고 도업을 이루어 중생을 제도하고자 감사한 마음으로 이 공양 듭니다." 또한 우리에게 식탁은 어떤 부름, 그러한 공간이 아닌가. 식탁의 부름이란 저물녘 골목에 흩어져 놀던 우리를 부르는 소리, '진석아 그만 놀고 들어와 밥 먹어라'던 어린 날 어머니의 목소리처럼 간절하지 않은가. 신(神) 또한 마지막 날에 우리를 그렇게 부를 것이다. "그만 놀고 돌아오너라!"
어머니는 아들이 학교에서 돌아올 시간에 맞춰 라면을 끓였다. 오자마자 먹을 수 있도록. 가방을 집어 던지고 "학교에 다녀왔습니다!"라고 외친 다음 콧물도 씻지 않고 달려들어 먹을 수 있는 그런 라면을 끓였다. 그러나 아들은 금세 집에 돌아가지 않았다. 10원을 내면 두 장을 고를 수 있는 만화경을 보거나 만화방을 기웃거렸다. 친구를 변소 뒤로 불러내 '결투'도 했다. 라면은 하염없이 식어갔다. 아들은 퉁퉁 분 라면을 말 없이 먹었다. 김치를 사각사각 씹으며. 식은 국물엔 식은 밥을 말았다.
허진석 문화스포츠레저부장 huhball@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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