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bar_progress

글자크기 설정

닫기

내가 흔들 깃발은 뭔가…뭉개진 정체성의 붓끝

시계아이콘02분 27초 소요
언어변환 숏뉴스
숏 뉴스 AI 요약 기술은 핵심만 전달합니다. 전체 내용의 이해를 위해 기사 본문을 확인해주세요.

불러오는 중...

닫기

-재중작가 최헌기 회고전…경계에서 느낀 감정, 국제정세 비판적 시각 담아
-'디아스포라'의 삶과 예술 살피는 영화, 미술관서 상영도


내가 흔들 깃발은 뭔가…뭉개진 정체성의 붓끝 최헌기 작가
AD

내가 흔들 깃발은 뭔가…뭉개진 정체성의 붓끝 최헌기, '자화상', 150×145cm, 1994년.


[아시아경제 오진희 기자] 조국을 떠나온 이민자들. 디아스포라(Diaspora, 이주자)의 삶과 이들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을 가늠해 볼 수 있는 문화행사들이 마련됐다. 재중작가 최헌기의 회고전과 '떠도는 몸들'이라는 작은 영화제다. 최헌기 작가(54)는 중국 문화계에 자리를 잡은 보기 드문 동포 화가로, 중국인과 한국인의 경계에서 살아온 자신의 삶을 20년 넘게 회화와 설치작품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 속에는 정체성의 문제와 예술의 가치, 국제 정세를 향한 날카로운 비판이 담겨 있다. '이산(離散)'을 주제로 한 영화 상영에는 한국계 고려인이 지닌 이주의 기억 등을 주제로 한 작품을 만날 수 있다.

◆'자화상·광초·실험'이 빚은 디아스포라 예술= 최헌기의 작품은 '자화상', '광초', '실험'을 키워드로 갖는다. '자화상'과 관련해선 굳이 작품 속에 작가 자신의 얼굴을 투영한 흔적을 거론하지 않더라도, 최헌기의 모든 작품이 자화상으로 느껴지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이번 회고전의 시작점이 되는 '자화상'이란 제목을 가진 작품만 봐도 그렇다. 모두 세 개의 화면으로 구성된 초대형 자화상인데, 흔히 알고 있는 것과는 다르게 작가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 대신 한국의 태극기와 중국의 오성홍기, 북한의 인공기가 일그러진 모습으로 그려져 있을 뿐이다. 여기에 얼룩진 듯 처리한 붓질은 작품을 추상화로 다가오게 한다. 더욱이 작가는 관람객들에게 이 작품에다 매직으로 사인(서명)을 하도록 유도하고 있다. 1994년 제작돼 그 해 중국에서 첫 전시를 가진 이 작품에는 온갖 이름들이 낙서처럼 즐비하다. 최 작가는 "북한에서도 전시를 통해 관람객들의 사인을 받으려 했지만, 추상작품을 반사회적 예술로 치부하는 풍토로 전시가 좌절되고 말았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아버지의 나라는 한국이었고, 내가 살아온 곳은 중국이다. 그런데 나는 중국인과도, 한국인과도 구별된 채 살아왔다"며 "이런 환경이 혼란스럽기도 했지만 예술가로서는 '부자'일 수 있다"고 했다. 작가의 부모는 전라북도 부안과 김제 출신으로 어릴 적 일제강점기 때 중국으로 건너갔다.


그가 제작한 많은 작품에는 한자 서체 중 흘림체인 '초서(草書)'를 닮은 글씨들이 부유한다. 사실 실제 글자가 아닌, 작가가 그저 모양만 닮게 가공한 것이다. 작가는 이를 '광초(狂草)라 부른다. 그는 "10년 넘게 광초를 쓰고 있다. 동양예술철학 중에서도 서예를 통해 전통을 강하게 느낀다"며 "관객들이 작품을 보고 자신만의 생각을 갖게 하고 싶었다. 형태가 글씨 같아 보일 뿐 사실 아무 뜻은 없다"고 했다. 광초는 대형 캔버스 위에도, 천장 위에 매단 모빌, 조각에서도 보인다.


'6자회담'이란 작품에서는 디아스포라로서의 작가적 시각이 돋보인다. 남북한을 사이에 둔 미국·중국·러시아·일본을 상징하는 인물들 가운데 만국기로 꾸며진 미사일이 그려져 있다. 그리고 '6×9=96'라는 메시지가 쓰여 있다. 작가는 "6자회담이 해결책이 될 순 없다고 생각이 들었다. 북핵 문제는 국제사회 모두가 만들어 낸 것이 아닌가"라며 "육 곱하기 구는 오십사지만, 사실 사회적 약속 또는 틀일 뿐 진실은 '우리가 직접 보고 느낄 수 있는 것'이라는 걸 상징적으로 나타낸 것"이라고 설명했다.


최 작가의 실험과 파격은 '광초'를 비롯 작품의 재료와 형태, 방식 등까지 뻗어 나간다. 액자 속에서 쏟아져 나오는 천 작품과 에폭시·실리콘·아크릴·유화 등이 뒤섞인 캔버스, 눈을 감고 명상에 빠진 모나리자의 누드 흉상 등이 있다. '붉은 태양'이란 초대형 설치작업에서는 조각상으로 빚은 마르크스, 레닌, 마오쩌둥과 같은 사회주의 사상가들이 허공에 손짓하며 무수한 이야기를 내뱉고 있다. 광초로 표현된 이들의 언설은 명품으로 치장된 거짓 태양을 감싸듯 맴돈다. 양립할 수 없는 가치들이 공존하는 현재를 상기시키고자 작가가 고안한 장치다.


최 작가는 중국 길림성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백두산 밀림에서 양봉을 했다. 작가는 문화대혁명이 끝난 후 중국 옌볜대학교 미술학과, 베이징 중앙미술학원에서 수학했다. 지난해에는 한국 홍익대학교 미대에서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그동안 중국국립미술관, 광주비에날레 등에서 전시를 가진바 있다. 현재 베이징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향후 강원도 동해 망상해수욕장 인근에 화가촌을 만들 계획이다. 전시는 오는 5월 31일까지. 서울 신문로 성곡미술관 전관. 02-737-8643.


내가 흔들 깃발은 뭔가…뭉개진 정체성의 붓끝 최헌기, '설국', 2015년.


내가 흔들 깃발은 뭔가…뭉개진 정체성의 붓끝 최헌기, '붉은 태양', 2013년.


◆'떠도는 몸들' 스크린 프로젝트= 디아스포라 예술을 폭넓게 이해하기에 좋을만한 영화도 기억해 두면 좋겠다. 미술관에서 전시형태로 진행되는 상영회는 지난해 서울시립미술관 본관에서 개최된 '아프리카 나우' 전시의 연장선상에서 마련된 프로그램이다. 아프리카-유럽-중앙아시아-한국으로 이어지는 이주자의 정체성과 디아스포라의 지형도를 살펴보고, 새로운 방향에 대하 논의하기 위해 기획됐다. 1980~90년대 영국에서 흑인 영화 르네상스를 주도하며 왕성한 활동을 벌였던 그룹 '블랙 오디오 필름 콜랙티브'의 작품과 함께, 카자흐스탄에서 태어난 고려인으로 러시아와 중앙아시아에 걸쳐 거주하고 있는 한국계 소수민족인 고려인의 디아스포라에 관한 영화를 선보이고 있는 송 라브렌티 감독(74), 한국 안산에서 거주 중인 고려인들의 삶을 조망하는 김 정 감독(54)의 영화를 상영한다. 이외에도 전시 기간 중 국내외 학자들을 초빙해 디아스포라와 국경 문제에 관한 강연도 개최된다. 오는 5월 17일까지. 서울 시립미술관 서소문 본관 프로젝트 갤러리. 02-2124-8800.


오진희 기자 valere@asiae.co.kr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AD
AD

당신이 궁금할 이슈 콘텐츠

AD

맞춤콘텐츠

AD

실시간 핫이슈

AD

놓칠 수 없는 이슈 픽

  • 25.12.0209:29
    자식 먹이고자 시도한 부업이 사기…보호망은 전혀 없었다
    자식 먹이고자 시도한 부업이 사기…보호망은 전혀 없었다

    "병원 다니는 아빠 때문에 아이들이 맛있는 걸 못 먹어서…." 지난달 14일 한 사기 피해자 커뮤니티에 올라 온 글이다. 글 게시자는 4000만원 넘는 돈을 부업 사기로 잃었다고 하소연했다. 숨어 있던 부업 사기 피해자들도 나타나 함께 울분을 토했다. "집을 부동산에 내놨어요." "삶의 여유를 위해 시도한 건데." 지난달부터 만난 부업 사기 피해자들도 비슷한 상황에 놓여있었다. 아이 학원비에 보태고자, 부족한 월급을 메우고자

  • 25.12.0206:30
    "부끄러워서 가족들한테 말도 못 해"…전문가들이 말하는 부업사기 대처법 ⑤
    "부끄러워서 가족들한테 말도 못 해"…전문가들이 말하는 부업사기 대처법 ⑤

    편집자주부업인구 65만명 시대, 생계에 보태려고 부업을 시작한 사람들이 부업으로 둔갑한 사기에 빠져 희망을 잃고 있다. 부업 사기는 국가와 플랫폼의 감시망을 교묘히 피해 많은 피해자를 양산 중이다. 아시아경제는 부업 사기의 확산과 피해자의 고통을 따라가 보려고 한다. 전문가들은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중심으로 확산하는 부업 사기를 두고 플랫폼들이 사회적 책임을 갖고 게시물에 사기 위험을 경고하는 문구를 추가

  • 25.12.0112:44
    부업도 보이스피싱 아냐? "대가성 있으면 포함 안돼"
    부업도 보이스피싱 아냐? "대가성 있으면 포함 안돼"

    법 허점 악용한 범죄 점점 늘어"팀 미션 사기 등 부업 사기는 투자·일반 사기에 해당한다는 이유로 구제 대상에서 제외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부업 사기도 명확히 전기통신금융사기(보이스피싱)의 한 유형이고 피해자는 구제 대상에 포함되도록 제도가 개선돼야 합니다."(올해 11월6일 오OO씨의 국민동의 청원 내용) 보이스피싱 방지 및 피해 복구를 위해 마련된 법이 정작 부업 사기 등 온라인 사기에는 속수무책인 상황이 반복되

  • 25.12.0112:44
    의지할 곳 없는 부업 피해자들…결국 회복 포기
    의지할 곳 없는 부업 피해자들…결국 회복 포기

    편집자주부업인구 65만명 시대, 생계에 보태려고 부업을 시작한 사람들이 부업으로 둔갑한 사기에 빠져 희망을 잃고 있다. 부업 사기는 국가와 플랫폼의 감시망을 교묘히 피해 많은 피해자들을 양산 중이다. 아시아경제는 부업 사기의 확산과 피해자의 고통을 따라가보려고 한다. 나날이 진화하는 범죄, 미진한 경찰 수사에 피해자들 선택권 사라져 조모씨(33·여)는 지난 5월6일 여행사 부업 사기로 2100만원을 잃었다. 사기를 신

  • 25.12.0111:55
    SNS 속 '100% 수익 보장'은 '100% 잃는 도박'
    SNS 속 '100% 수익 보장'은 '100% 잃는 도박'

    편집자주부업인구 65만명 시대, 생계에 보태려고 부업을 시작한 사람들이 부업으로 둔갑한 사기에 빠져 희망을 잃고 있다. 부업 사기는 국가와 플랫폼의 감시망을 교묘히 피해 많은 피해자들을 양산 중이다. 아시아경제는 부업 사기의 확산과 피해자의 고통을 따라가보려고 한다. 기자가 직접 문의해보니"안녕하세요, 부업에 관심 있나요?" 지난달 28일 본지 기자의 카카오톡으로 한 연락이 왔다.기자가 사회관계망서비스(SNS) 인스

  • 25.12.0513:09
    김용태 "이대로라면 지방선거 못 치러, 서울·부산도 어려워"
    김용태 "이대로라면 지방선거 못 치러, 서울·부산도 어려워"

    ■ 방송 : 아시아경제 '소종섭의 시사쇼'(월~금, 오후 4~5시)■ 진행 : 소종섭 정치스페셜리스트 ■ 연출 : 박수민 PD■ 출연 : 김용태 국민의힘 의원(12월 4일) "계엄 1년, 거대 두 정당 적대적 공생하고 있어""장동혁 변화 임계점은 1월 중순. 출마자들 가만있지 않을 것""당원 게시판 논란 조사, 장동혁 대표가 철회해야""100% 국민경선으로 지방선거 후보 뽑자" 소종섭 : 김 의원님, 바쁘신데 나와주셔서 고맙습니다. 김용태 :

  • 25.12.0415:35
    강전애x김준일 "장동혁, 이대로면 대표 수명 얼마 안 남아"
    강전애x김준일 "장동혁, 이대로면 대표 수명 얼마 안 남아"

    ■ 방송 : 아시아경제 '소종섭의 시사쇼'(월~금, 오후 4~5시)■ 진행 : 소종섭 정치스페셜리스트 ■ 연출 : 이경도 PD■ 출연 : 강전애 전 국민의힘 대변인, 김준일 시사평론가(12월 3일) 소종섭 : 국민의힘에서 계엄 1년 맞이해서 메시지들이 나왔는데 국민이 보기에는 좀 헷갈릴 것 같아요. 장동혁 대표는 계엄은 의회 폭거에 맞서기 위한 것이었다고 계엄을 옹호하는 듯한 메시지를 냈습니다. 반면 송원석 원내대표는 진심으로

  • 25.11.2709:34
    윤희석 "'당원게시판' 징계하면 핵버튼 누른 것"
    윤희석 "'당원게시판' 징계하면 핵버튼 누른 것"

    ■ 방송 : 아시아경제 '소종섭의 시사쇼'(월~금, 오후 4~5시)■ 진행 : 소종섭 정치스페셜리스트 ■ 연출 : 이경도 PD■ 출연 : 윤희석 전 국민의힘 대변인(11월 24일) 아시아경제 '소종섭의 시사쇼'에 출연한 윤희석 전 국민의힘 대변인은 "장동혁 대표의 메시지는 호소력에 한계가 분명해 변화가 필요하다"고 진단했다. 또한 "이대로라면 연말 연초에 내부에서 장 대표에 대한 문제제기가 불거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한동훈 전

  • 25.11.1809:52
    홍장원 "거의 마무리 국면…안타깝기도"
    홍장원 "거의 마무리 국면…안타깝기도"

    ■ 방송 : 아시아경제 '소종섭의 시사쇼'(월~금, 오후 4~5시)■ 진행 : 소종섭 정치스페셜리스트 ■ 연출 : 마예나 PD 지난 7월 내란특검팀에 의해 재구속된 윤석열 전 대통령은 한동안 법정에 출석하지 않았다. 특검의 구인 시도에도 강하게 버티며 16차례 정도 출석 요청에 응하지 않았다. 윤 전 대통령의 태도가 변한 것은 곽종근 전 육군 특수전사령관이 증인으로 나온 지난달 30일 이후이다. 윤 전 대통령은 법정에 나와 직접

  • 25.11.0614:16
    김준일 "윤, 여론·재판에서 모두 망했다" VS 강전애 "윤, 피고인으로서 계산된 발언"
    김준일 "윤, 여론·재판에서 모두 망했다" VS 강전애 "윤, 피고인으로서 계산된 발언"

    ■ 방송 : 아시아경제 '소종섭의 시사쇼'(월~금, 오후 4~5시)■ 진행 : 소종섭 정치스페셜리스트 ■ 연출 : 이미리 PD■ 출연 : 강전애 전 국민의힘 대변인, 김준일 시사평론가(11월 5일) 소종섭 : 이 얘기부터 좀 해볼까요? 윤석열 전 대통령 얘기, 최근 계속해서 보도가 좀 되고 있습니다. 지난해 국군의 날 행사 마치고 나서 장군들과 관저에서 폭탄주를 돌렸다, 그 과정에서 또 여러 가지 얘기를 했다는 증언이 나왔습니다. 강


다양한 채널에서 아시아경제를 만나보세요!

위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