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청춘들 사이에 유행한다는 '썸타기'는, 그저 즉흥적인 언어센스의 발휘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생각보다 의미심장하다. 썸은 something에서 나온 말이고, '타기'는 '잠수타다'라는 다른 유행어에서 파생된 말인 듯 하다. 섬씽은 '사랑'이 아니라 사랑으로 갈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 관계의 결속력을 느슨하게 한 '해체'된 관계이다. 내것인듯 내것 아닌, 내것 같은, 그 경계의 줄타기가 바로 썸이다. 잠수를 타는 것은 물밑에 들어가 헤엄치는 행위이다. 표면에는 보이지 않지만 아예 움직이지 않는 것은 아니고 다만 몰래 움직일 뿐인 상태이다. 관계의 은폐가 '타다'라는 말에 들어있다. 애매하고 유보적이며 희망도 절망도 반반인 상태의 관계인 썸과, 그 관계의 존재 자체를 숨기고 가리는 '타다'가 만난 것이 '썸타기'라고 볼 수 있다.
왜 사랑마저 명쾌하지 않고 간절하지 않으며 제대로 똑부러지게 예약하지 않는가. 이른바, 간을 보는가. 그것은 사회의 불확실성, 미래의 불확실성, 경제의 불확실성, 자기 정체성 확립의 불확실성이, 선택을 간섭하기 때문이다. 사랑마저 유보적인 태도가 되는 이 현상은, 청춘이 희망의 대륙에서 절망의 대륙으로 넘어가는 그 경계에 내몰려 있기 때문에 발생한다고 볼 수 있다. 선택하면 손해다. 책임질수도 없다. 잘되면 좋겠지만 그렇게 될 보장도 없고 의욕도 없고 미친 열정도 없다. 그저, 이 순간 사랑의 겉시늉만 갖추며 거리를 활보하면 되는 것이다.
썸사회는, 정치와 경제, 문화와 예술, 전방면에 걸쳐 명쾌하지 않고 어둡고 아리송한 그림자를 드리운다. 드러나는 것은 짐작하기도 어려운 애매한 현상들 뿐이다. 내부에서 출렁이는 것들은 너무나 복잡하게 엮여 있어서, 추출하기도 어렵다. 경제도 이전의 법칙이나 관행대로 돌아가지 않는다. 투자공식도 마찬가지다. 불확실은 이제 시대의 명제가 되었다. 썸사회의 징후들은, 지금까지의 삶에 익숙해져있는 우리에게 불편하고 혼란스러운 것들이 될 수도 있다. 이것은 그러나, 삶의 문제들이 획일적으로 장악되지 않고, 인과관계 또한 해체되고, 그저 불쑥 떠올랐다가 사라져버리는 부빙처럼 잠정적인 것이 되어가는 흐름의 단면도일 수 있다. 인간과 사물, 인간과 인간이 서로를 확고하게 쥘 수 없고, 다만 '접속'만 하는, 모든 것을 임대하는 시대가 닥쳐온다고 했던, 그래서 소유의 종말이 온다고 예언한 어느 사회학자가 떠오른다. /빈섬.
이상국 편집에디터, 스토리연구소장 isomis@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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