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지우가 연작시들의 제목을 '나는 너다'라고 붙였던 80년대에, 나는 저 간단한 문장의 심각함에 대해 생각해보지 않았던 것 같다. 오히려 '나는 나다'의 문제에 집착하여, 자기 정체성과 삶의 동일성, 타자와의 구별과 차별, 유니크하게 살아가는 일의 위험과 고단함과 불편함에 대해 더 끙끙 앓았던 것 같다.
이제야 '나는 너다'의 문제를 의미있게, 그리고 낯설게 바라보기 시작했다. 세상에 개별자로 태어나, 타인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공감하고 함께 행동하고 감정과 생각을 나누는 일이란, 불가능과 기적들의 연속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나라는 본위를 벗어난 존재를, 적어도 자기가 돌이켜 내면으로 들어가 살필 수 있는 자기만큼 인식하는 문제는, 인간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그 언저리에서 맴돌다 가는, 불가해한 영역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내가 너일 수 있는가. 신체적으로 너일 수는 없지만, 마음은 온전히 너일 수 있는가. 사랑은 그런 상태를 만들어내는가. 신체가 분리되어 있는 한, 마음의 합일이나 공감이나 연대는 늘 분리될 수 있는 잠정적인 결탁일 뿐인가. 분리된 신체보다 강한 정신적 교합이 가능한가. 그런 욕망 자체가 조물주의 뜻을 벗어난 어리석음과 과욕에 불과한가. 내가 너라는 것. 내 몸까지도 네 몸과 다름없다는 것. 우린 섣불리, 그리고 시끄러울 만큼 호들갑스럽게 그런 공수표를 날려왔지만, 황지우도 자기 속으로 어떤 애인 하나 제대로 데리고 들어가지 못했음을 뼈아픈 후회로 말하지 않았던가.
내 내면에 있는 사막의 호텔에는 불이 꺼진 채 늙어가는 주인만 웅크리고 있으며, 어떤 타인도 들어와 머물지 못하는 폐허이지 않은가. 내가 언제, 누구라도 너였던 적이 있었던가. 너는 무엇이며, 나는 무엇인가. 내 관계 속에 들어있는, 저 수많은 교착과 불통과 혼선의 너는.
이상국 편집에디터, 스토리연구소장 isomis@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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