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경제가 전래의 경기부양책으로는 극복할 수 없는 구조적 장기정체에 빠졌다는 비관론이 팽배하다. 주요국들의 경제가 불황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탓이다.
미국 경제는 올해 2분기부터 회복의 기미를 보여주고 있으나 그 기세가 견실하지 않다. 미국 실업률은 10월에 5.8%로 6년여 만의 최저치를 기록했으나, 취업하기를 포기한 실망실업자까지 더하면 실제 실업률이 20%를 웃돈다는 분석도 있다. 유로존(유로화 사용 18개국)은 지난해까지 2년간 마이너스 성장에서 올해 플러스 성장으로 돌아섰지만, 연간 성장률이 1%에 못 미칠 것 같다. 일본은 2분기 연속 마이너스 성장이 확인되자 지난주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아베노믹스에 대한 국민의 신임 여부를 묻겠다며 중의원 해산과 총선거 실시를 선언했다.
신흥국들도 경제 실적이 시원치 않다. 최근 몇 년간 미국과 일본의 양적완화와 유럽의 초저금리 정책 덕분에 유동성 파티를 즐겼다고 하지만 신흥국 전체 성장률은 올해까지 3년 연속 5% 미만이다. 내년에는 신흥국 경제가 더 나빠지리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신흥국 대표 격인 중국의 성장률은 올해까지 3년 연속 7%대를 유지한 뒤 내년에 6%대로 떨어질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2010년까지 10%대를 유지했던 것에 비하면 '주저앉고 있다'는 표현이 적절하다 싶을 정도다.
이런 상태가 일반적인 경기순환 주기상 불황 국면을 거치는 과정이라면 경기 호전에 대한 희망을 품을 수 있다. 그런데 아무래도 그렇지 않은 것 같다는 불길한 느낌이 자꾸 든다. 이런 느낌이 세계경제 장기정체론을 떠받치고 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로부터 벌써 6년이 지나고 있다. 그동안 선진국과 신흥국들이 구제금융, 통화증발, 재정확대 등으로 얼마나 많은 유동성 공급에 나섰는가? 그럼에도 여태 세계경제가 이 모양이니 문제가 심각하다.
세계경제 장기정체론은 로렌스 서머스 하버드대 교수가 지난해 11월 국제통화기금 포럼과 올해 2월 미국경영경제학회에서 주장해 주목받았다. 장기정체(secular stagnation)라는 용어는 대공황 시절인 1930년대에 경제학자 앨빈 핸슨이 만들어 사용했던 것인데, 서머스가 망각 속에서 되살려냈다.
그 원인은 수익성 있는 투자기회의 급감, 인구구조의 변화, 생산성을 높이는 기술혁신의 한계, 소득분배 불평등에 의한 수요부족 만성화 등 여러 가지로 설명된다. 그 메시지의 핵심은 경제시스템 내부의 작용이나 통상적 금융ㆍ재정정책만으로는 장기정체에서 헤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여기서 경제시스템은 자본주의 체제와 같은 의미다.
그렇다면 다른 길은 전혀 없나? 그렇지는 않다. 경제시스템 바깥에서 돌파구가 열릴 수 있다. 대공황은 뉴딜정책으로 완화되긴 했으나 완치되지 않다가 2차 세계대전이라는 외생적 충격에 의해 극복됐다. 세계대전까지는 아니라도 국지전 같은 소규모 전쟁이나 냉전ㆍ군비강화 같은 유사 전쟁행위도 비슷한 효과를 낸다. 이슬람국가(IS)와 미국 등 서구 국가 간 갈등이나 일본의 군사대국화 움직임이 예사롭지 않게 보이는 이유다.
그러나 20세기의 비극이 21세기에 되풀이되면 안 된다. 장기정체론의 틀에서 생각한다면 뭔가 다른 외생변수가 있어야 한다. 지금은 40~60년 주기 콘드라티예프 순환의 제5파동이 끝나고 제6파동이 시작되는 때라고들 한다. 제2의 정보통신혁명이나 뭔가 새로운 기술혁명이 생산성을 끌어올리며 제6파동을 이끌게 될까?
그렇지 않다면 서머스의 제안대로 주요국들이 생산성 향상, 분배형평 제고, 과잉저축 해소, 투자ㆍ소비 촉진을 지향하는 구조개혁에 나서야 한다. 돈 풀기만 계속하면 금융불안을 키울 뿐이다. 우리와 같은 소규모 개방경제는 세계경제의 격랑에 휩쓸리지 않도록 방파제 보강에 신경 써야 할 시점이다.
이주명 논설위원 cmlee@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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