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 내가 생각날 때면 장흥길 한참 들어가 돌고개 중턱에 있는 작은 카페 패랭이꽃으로 오게나. 푸른 밤 눈 시린 하늘 아래 모든 불 꺼진 날 그대 오게나. 세상 일 먹먹하거든 열 일 제치고 차를 몰아 그곳으로 오게나. 거기 몇개의 감자나 고구마가 익어가는 모닥불과 따뜻한 아낙의 웃음이 덤으로 피어있지만 그것보다 유리창 너머로 떠있는 금목걸이같은 그믐달이 좋네. 희부윰하게 흔들리는 소나무 몇 그루와 무심히 앉은 바위 하나.낡은 벤치와 넘어진 고물자전거가 있는 풍경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직면해있던 모질고어지러운 한 생각들 다 헤슬헤슬 풀어질 걸세.
그래, 그대 패랭이꽃으로 오게나.
앉은 모두의 숨소리도 들릴 것 같은 좁직한 공간 안에 타닥타닥 타들어가는 몇 장작 슬픔들 바라보며 우린 잠시 웃을 수 있을 것이네. 그대 목소리만 듣고 있어도 다 괜찮아질걸세. 생각들이 순해지며 푸른 밤공기 안에 곱게 안길걸세. 아무 뜻없는 농담처럼 한 시절뜨락에 작고 어설픈 꽃 몇 송이 피어있는 셈일세. 그대 패랭이꽃으로 오게나. 아저씨는 간판이 안보인다고 좀 큰 걸 달면 안되겠느냐는 손님들의 성화에도 패랭이꽃은 그리 큰 것이 아니라며 한사코 굽이진 골목에 꽃잎 만한 간판을 고집하고 있다네. 안주로 나온 오징어가 너무 말랐다고, 혹은 서비스로 얹은 누룽지가 너무 푸석하다고 말하지 말게나
. 대신 별로 비싸지 않으면 되지 않았는가. 한번 정들어 계속 찾는 몇 단골을 위해 눈 펑펑 내리는 날에도 밤새도록 문을 열어놓고 있는, 그 카페는 그저 하나의 꽃가슴일세. 스스로 활짝 피어있는. 저만치 들에 혼자 피어있는 꽃일 뿐일세. 그대가 문득 꺾어든 하나의 우연일 뿐일세.
패랭이꽃은 석죽(石竹)이라 부르기도 하고 천국(天菊)이라 부르기도 하네. 잎과 줄기를 살펴보면 대나무를 닮아있네. 돌대라고 불리는 건, 돌처럼 단단하다든가 그런 의미는 아닌 거 같고, 우리 흔히 가짜, 싸구려, 엉터리 뭐 이런 걸 부를 때 붙이는 그 말머리의 '돌'이 아닌가 싶네. 말하자면 대같지도 않은 것이 꼴같잖게 대를 흉내낸다는 뜻이지 싶네. 하늘국화라 불리는 건, 요즘 술이름에 동명이 있어 감회가 있지만, 저 작은 꽃잎이 하늘거리면 정말 천국이라도 뒤흔들 것 같네. 저 붉은 꽃잎들의 잔잔한 전율이야 말로 천국의 미장센이 아닐까 싶네. 꽃잎 중간에 금줄처럼 처진 또렷한 무늬는 시골처녀의 손목에 두른 꽃팔찌같네. 제딴엔 끔찍한 멋을 부렸지만 그것조차도 왠지 보는 사람을 민망하게 하는 그런 아름다움일세. 하나의 줄기마다 오직 하나의 꽃을 매다는 정성으로 보자면 저 작은 화개 하나 하나는 그 목숨줄기들의 치열한 공들임이 아니겠는가. 저 꽃잎 하나를 내기 위해 떨었던 푸른 몸들을 생각해보게나. 그래서 패랭이꽃은 아름다운 것일세. 볼이 터질 듯이 웃고 있는 어느 시골색시. 입술에 문 옷고름이 흩날리네.
패랭이꽃에 관한 시들이 제법 있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건 김영태님의 <석죽(石竹)>이란 시일세.
두줄기 자주끈이
너의 머리카락 속에 고개를 내밀고 있다
너는 쓸쓸해 보일 때 마음에 들고
난감해 보일 적에 내 마음을 움직이게 한다
아무렇지도 않다고 너는 도리질을 하고 있다
지금도 너는 풀냄새가 난다
네가 돌아간 뒤에
다른 줄기 속에 숨어있는
석죽을 들여다 보면
풀냄새 같은 게...지나간다
<난감해 보일 적에 내 마음을 움직이게 한다>는 표현은 얼마나 나를 설레게 하는 지 모르네. 뭔가 어색하고 낯선 표정. 그러나 어쩐지 마음의 굽이째 슬그머니 내 마음으로 휘감아 들어오는 꽃. 여유만만하다든가 자랑스럽다든가 기쁘거나 슬픈 것이 아닌, 저 난감함. 어쩌면 나를 닮은, 그래서 쓸쓸해보이는 꽃. 내가 뭔가 말을 건네고 싶고 위로하고 싶지만 넌 말한다. 아무렇지도 않다고. 도리질을 한다. 그런 꽃일세. 어쩌면 내가 바라보는 그 가여운 자리의, 그 눈물나는 언저리의 그대처럼 이쁘고 쓸쓸한 꽃일세. 내게도 정말 풀냄새가 나네. 그대를 생각하면 기억 속에서 푸르고 씀씀한 풀냄새가 올라오네. 이렇게 그리운 법이 어디 있는가. 그대 한 시절의 하늘을 뒤흔든 패랭이꽃, 그 작은 가슴의 전율이여.
기분 좋아진 김에 류시화의 <패랭이꽃>도 읽어주고 싶네.
살아갈 날들보다
살아온 날이 더 힘들어
어떤 때는 자꾸만
패랭이꽃을 쳐다본다
한때는 많은 결심을 했었다
타인에 대해
또 나 자신에 대해
나를 힘들게 한 것은
바로 그런 결심들이었다
이상하지 않은가 삶이란 것은
자꾸만 눈에 밟히는
패랭이꽃
누군가에게 무엇으로 남길 바라지만
한편으론 잊혀지지 않는 게 두려워
자꾸만 쳐다보게 되는
패랭이꽃
패랭이꽃이란 뭇발에 밟히는 꽃이기도 하지만 가끔 무심한 어느 눈길에 쏙 들어와서 내내도록 눈에 밟히는 꽃이라네. 우리 가슴 속에 퍼담은 기억들이란 한 생애의 푸댓자루 같은 것이지만 가끔 그 속에서 꺼내보는 곱고 애잔한 것들이 있네. 그대는 혹은 잊혀졌으면 하는, 혹은 기억되었으면 하는, 그 하늘거리는 두 마음의 중턱에 문득 피어있는 사람이네. 잊혀지기에는 너무 또렷하고 기억하기에는 너무 애틋한 꽃사람일세.
로마에선 여인들이 전쟁에서 이기고 돌아오는 개선영웅들을 위해 가시나무관을 만들었네. 리구네스라는 한 젊은이는 여인들로부터 가시나무관 만드는 법을 배웠네. 그 이후로 모든 영웅들은 리구네스의 가시관을 사갔네. 여인들은 자신들의 자랑거리를 잃고 말았네. 성난 한 여인이 자신의 정부를 시켜 리구네스의 잠든 가슴에 비수를 찔렀네. 로마시민들은 이 아름다운 청년의 죽음을 슬퍼하며 며칠을 통곡했네. 그 울음소리 하늘에 들려, 아폴로신이 리구네스를 다시 세상에 피어나게 하였네. 카네이션보다 작아서 어쩐지 슬픈 붉은 꽃으로 들마다 하늘거리게 하였네. 사람들은 이꽃을 패랭이꽃으로 불렀다네. 중국에선 돌바위귀신이 마을 사람들을 괴롭혔다네. 한 용기있는 젊은이가 대로 만든 화살을 들고 산으로 올라가 그 바위귀신을 향해 쏘았다네. 어찌나 힘있게 쏘았던지 그 돌바위가 그만 죽고 말았다네. 죽은 바위에 꽂힌 대화살에서 뿌리가 돋고 잎이 돋더니 마침내 자줏빛 꽃이 피어났네. 석죽 위에 핀 저 맹렬한 꽃을 사람들은 패랭이라 불렀다네.
아아 그대 패랭이라 불러보게. 왠지 슬프고 야하고 아픈 이름이네. 패랭패랭 바람에 휩쓸려 돌아가는 팽이가 생각나기도 하고, 파랗게 질렸다 붉게 타버린 표정이 떠오르기도 하고 두들겨 팰 수록 독하게 살아나는 악다구니 소리같기도 하네. 볼이 홀쭉하게 야윈 떠돌이가 부는 피리소리가 떠오르기도 하네. 실은 패랭이는 옛사람들이 쓰고 다니던 모자의 이름이었네. 패랭이꽃잎을 뒤집어 쓰면 얼굴을 설핏설핏 가린 패랭이삿갓이 나오네. 패랭이의 꽃말이 뭔 줄 아는가. 은근히 바라보는 시선 속에 들끓는 맹렬하고 북받치는 사랑일세. 패랭패랭한 애가일세.
그대, 가끔 외롭고 괴로워 가슴에 덩이 뭉치는 밤이면 한 걸음에 내달려 저기 패랭이꽃으로 오게. 아아, 정녕 못오실 거라면 기억으로 오게. 희망으로 오게. 혹은 풋잠 속에 얼핏 떠오른 꿈으로 오게. 하늘거리는 그리움이 하나의 운명에 연착한 것처럼 패랭이꽃이 피어오르네. 엄동설한에, 꽃들이 모두 고개 꺾은 적요의 밤에, 그대 피어오르네. 패랭이꽃 밀어올리듯 아프고 아프게 생각이 솟아오르네.
이상국 편집에디터, 스토리연구소장 isomis@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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