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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베vs시진핑]②국가 흥망과 함께한 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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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베가 자라온 일본

[아베vs시진핑]②국가 흥망과 함께한 生 아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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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군사력을 지탱하는 경제적 기초인 공업시설을 파괴하고 재건을 불허한다. 일본인의 생활수준은 그들이 침략한 아시아 각국의 생활수준보다 높지 않도록 한다."


1945년 9월22일 미국 국무성은 이 같은 내용을 담은 '항복 후 미국의 초기 대일 방침'을 발표했다. 미국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일본에 강력한 경제제재 조치를 취해 다시금 군사대국으로 성장하지 못하게 만들 계획이었다. 일본의 생산시설을 필리핀 등 침략 피해당사국으로 이전하고 주일 미군의 주둔에 필요한 막대한 경비를 일본 정부에 부과해 엄청난 재정 부담을 떠넘기기도 했다. 1946년 미국이 일본에 요구한 주둔경비는 379억엔, 이는 일본 일반 회계예산의 32%에 달했다. 전쟁에서 진 일본은 이 같은 압박을 참고 견딜 수밖에 없었다. 연합군의 점령하에 놓인 일본으로서는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곧바로 이어진 냉전은 일본에 기회를 안겨줬다. 1948년 미국과 소련의 대결구도가 분명해짐에 따라 일본의 운명은 달라졌다. 미국 입장에서 소련을 막는 방파제로 일본을 이용해야 할 필요성이 커졌기 때문이다. '주식회사 일본'은 그렇게 다시 시작됐다.



◆일본 경제의 부활= 요시다 시게루(吉田茂) 일본 총리는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하늘이 우리를 도왔다"고 말했다. 연합국이 전쟁에 쓰이는 물자와 서비스 등을 일본에서 조달함에 따라 일본은 한국전쟁특수를 누리게 된 것이다. 일본 외무성 조사에 따르면 1950년 일본 외화수입 가운데 한국전쟁특수가 차지한 비율은 14.8%, 1951년에는 26.4%, 1952년에는 36.8%였다. 이 덕택에 일본은 한국전쟁이 한창 진행 중인 1952년에 2차 세계대전 이전의 경제규모로 복귀했다.

훗날 일본 총리가 된 아베 신조(安倍晋三)는 일본이 다시 살아나기 시작한 1954년에 태어났다. 그가 보냈던 어린 시절, 일본은 패전의 상처를 딛고 일어서는 시기였다. 1955년 거대 보수정당인 자민당이 그의 외할아버지 기시 노부스케(岸信介)에 의해 창당되면서 전후 일본의 정치적 안정을 가져온 55년 체제가 완성됐다.


기시의 주도로 1960년 미일 안보조약을 체결한 일본은 안보 불안 문제를 해결하고 경제개발에 매진했다. 안보조약 논란으로 총리직을 사임한 기시에 이어 총리가 된 이케다 하야토(池田勇人)는 '소득배증계획'(10년내 국민소득을 두 배로 만드는 계획)을 성공적으로 추진했다. 기시의 친동생이자 아베의 작은 외할아버지인 사토 에이사쿠(佐藤榮作)는 이케다의 뒤를 이어 역대 최장수(7년) 총리직을 맡으며 경제 성장과 함께 한일협정, 오키나와 반환 등을 마무리했다.


기시-이케다-사토로 이어지는 관료출신 총리는 일본 경제 성장의 기틀을 마련했다. 일본중앙은행(BOJ)과 통상산업성(통산성)을 중심으로 한 정부 주도의 중공업 육성 정책은 개방경제의 외형을 유지하면서도 국내 산업을 보호하고 외국 자본의 침투를 막아내며 일본의 수출을 빠르게 증가시켰다. 중화학공업 육성정책 덕분에 일본은 선박, 철강 생산에서 세계 1위로 뛰어올랐다. 1960년대 40억달러 수준이었던 일본의 수출은 1965년에 84억달러로 두 배 이상 오른데 이어 1970년에는 193억달러를 넘어섰다. 1968년 일본은 독일을 제치고 미국의 뒤를 이어 세계 2위의 경제대국으로 떠올랐다.


전후 일본의 경제성장 방식은 관 주도 방식이었다. 통산성이 구체적인 전략산업을 정하면 정부가 나서서 규모의 경제를 만들 수 있도록 전략산업을 구조조정하는 형식의 산업정책을 취했다. 이를 위해 관료들은 기업들에 조세감면, 정책금융 등의 당근과 행정명령, 법률, 규제 등의 채찍 등을 쏟아부었다. 이 같은 관료 주도의 산업화 정책은 자민당으로 대표되는 보수정당의 지지를 받으며 강력히 추진됐다. 정부의 지원을 바탕으로 일본의 대기업들이 전략 산업에 과감한 투자에 나설 수 있었다.


◆한계에 봉착한 경제성장= 1970년대 석유위기를 겪으면서 일본의 성공 신화는 주춤거리기 시작했다. 일본은 겉으로는 성장세를 지속하면서 미국을 위협하는 경제대국으로 성장했지만 내부적으로는 성장의 한계에 직면했다. 고도성장을 지원했던 자민당은 높은 인플레이션, 성장 둔화 등으로 그동안 경제 발전에서 소외된 집단들이 경제 성장 정책에 반발하면서 위기를 맞았다. 보수 세력의 연합만으로는 더 이상 정권을 유지할 수 없게 된 자민당은 그동안의 친기업적인 정책 노선 대신 포괄정당(catch all party) 노선을 채택한다.


관 주도의 성장방식에도 변화가 필요했다. 그동안 일본 경제 성장을 주도한 통산성과 대장성의 산업통제 정책 역시 금융시장의 발전과 기업들의 목소리가 커지면서 힘을 잃게 됐다. 은행 대출을 움켜쥐고 기업들의 투자를 관리했던 일본 정부는 과거와 같은 산업통제를 더 이상 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그 결과 다른 선진국들이 겪었던 중복 과잉 투자 등의 문제는 일본도 더 이상 예외가 아니게 됐다.


일본에 대한 외국의 견제도 거세졌다. 미국 등은 일본이 인위적으로 낮은 환율 정책을 고수하고 있다며 엔화 가치를 평가 절상할 것을 강하게 요구했다. 이에 따라 1985년 9월 뉴욕 플라자호텔에서 선진5개국 재무장관과 중앙은행 총재는 엔화 환율을 조정하기로 합의했다. 1980년대 1달러당 260엔 수준이었던 엔화는 1달러당 79엔으로 급상승했다. 엔화 가치의 급격한 변동으로 인한 수출 부진과 그에 따른 경기 침체를 우려한 일본 정부는 금리를 급격히 낮췄다. 하지만 이 같은 유동성 증가 정책은 부동산 가격과 주식시장의 폭등으로 이어지면서 또 다른 문제를 일으켰다.


◆잃어버린 20년을 맞다= 1989년 일본의 대기업 미쓰비시 부동산이 뉴욕의 상징과도 같은 록펠러센터를 사들이고, 소니가 미국의 대표적 영화사 컬럼비아 픽처스를 인수하는 등 일본 경제는 세계를 삼키는 듯했다. 겉보기에는 일본 경제의 최전성기였지만 속으로 썩어 들어가고 있었다. 일본 경제가 거품경제에 진입했기 때문이다.


일본 정부는 주식과 부동산의 급등으로 인한 인플레이션을 우려해 1989년 재할인율 인상을 시작으로 전격적으로 금리를 올리고, 부동산 담보대출을 규제하는 조치를 내놓는다. 거품경제 과열을 막기 위한 조치는 결국 거품경제 붕괴를 촉발했다. 주가와 땅값이 폭락하고 은행들은 대규모 부실채권 문제를 떠안게 된다. 일본 정부는 막대한 재정적자를 감수하면서 경기 부양에 나섰지만 이는 천문학적인 재정적자만을 기록하며 일본의 취약점인 재정상황을 더욱 악화시켰다. 장기불황의 이면에는 환부를 드러내 수술을 하기보다는 땜질식 처방만을 내놓았던 일본 정치권과 관료의 무능력이 있었다.


엔고 환경은 다른 측면에서 일본 경제를 수렁으로 몰아갔다. 엔화 평가 절상으로 가격 경쟁력을 상실한 일본 기업들은 급격히 해외로 생산기지를 옮겼다. 자연히 일본에서는 산업공동화 현상이 발생하면서 실업률 증가와 임금감소, 소비 억제 등 경제 불황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다


일본의 잃어버린 20년이 시작된 해로 꼽히는 1991년은 아베에게도 특별한 해였다. 아버지 아베 신타로가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의 비서로 정치를 배웠던 아베는 이제 아버지를 대신해 본격적으로 정치에 뛰어들기 시작했다. 냉전의 축복 속에 성장했던 일본은 소련의 붕괴(1991년)와 함께 찾아온 탈냉전시기를 잃어버린 20년과 함께 보내게 됐다. '주식회사 일본'은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의 등장으로 잠시 회복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2008년 세계경제 위기가 터지면서 다시금 흔들렸다.


전후 잿더미 속에서 급속도로 회복했던 일본에서 아베는 행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지만, 성인이 돼 정치에 투신했을 때에는 이미 속으로 병든 일본의 환부를 수술하는 데 몰두했다. 2012년 12월 총리가 된 아베는 일본의 장기침체에서 벗어나기 위해 엔저를 기반으로 한 '아베노믹스'를 내걸고 일본 경제의 새출발을 시도하고 있다.



[아베vs시진핑]②국가 흥망과 함께한 生


[아베vs시진핑]②국가 흥망과 함께한 生 시진핑


시진핑이 자라온 중국
1950년 중국 국가주석의 봉급은 쌀을 기준으로 매겨졌다. 쌀 3000근에 해당하는 만큼의 돈이 한 달 급여였다. 장관급은 2400근, 국장급은 1800근의 쌀을 살 수 있는 돈 만큼을 급여로 받았다. 1949년 중국 공산당이 새로 나라를 세운지 1년이 지났지만 화폐 가치가 안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상품의 가치 기준이 화폐가 아닌 쌀에 의해 매겨진 것이다. 당시 인구만 많고 가난한 나라였던 중국의 한 단면이었다.


중국은 건국 초기 급격한 통화팽창과 물가폭등 등으로 골머리를 앓았다. 물가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근대화 이후 열강의 침략을 받아 제대로 된 공업시설을 마련할 기회조차 갖지 못한 데다 그나마 있던 공업시설 역시 항일전쟁과 국민당과의 내전으로 파괴됐다. 철도와 도로 등 사회기반시설도 제대로 남아있지 않았다. 1949년 당시 중국의 공업생산액 규모는 전쟁 전에 비해 반으로 줄어든 상황이었다. 시진핑(習近平)은 1953년 가난한 대국의 수도 베이징에서 태어났다.


◆대약진운동의 대실패= 전쟁의 폐허 속에서도 새로 건국한 중국은 빠른 경제 회복세를 보였다. 공장, 광산, 철도, 은행 등에 대한 국유화와 함께 대대적인 토지개혁이 이뤄지면서 연평균 성장률은 20.3%에 이르는 성과를 보였다.


중국은 사회주의 공업화 기초를 마련하기 위해 1차 5개년 계획(1953~1957년)을 세웠다. 계획의 주요 내용은 중공업우선 발전 전략을 채택해 공업화의 기반을 닦는 것이었다. 중국이 경제발전 초기부터 중공업을 강조한 이유는 중공업은 곧 군비이고 국력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중국의 대대적인 공업화 움직임은 소련의 지원 등에 힘입어 상당한 성과를 거뒀다. 하지만 경공업 생산을 등한시한 탓에 만성적인 물자부족에 시달리기도 했다.


하지만 이 같은 경제 성장기는 오래가지 못했다. 소련이 1957년 갑작스레 지원을 중단하면서 중국 경제 성장 전략에 제동이 걸렸다. 외부의 지원이 끊기자 중국은 지방의 자생적인 공업화를 주요 내용으로 하는 '대약진운동'을 실시했다. '하면 된다' 식으로 밀어붙인 대약진운동은 단기간내에 주요 농ㆍ공업품의 생산을 2배로 성장시키는 것을 목표로 했다.


대약진운동은 대기근과 겹치면서 대재앙으로 끝났다. 정치운동으로 시작된 대약진운동은 경쟁적인 '생산량 부풀리기'만 양산했다. 서류상으로는 중국 전역에 식량이 넘쳐났지만 실제는 먹을 것이 없어 굶어죽는 사람들이 다수 발생했다. 더 큰 문제는 국민이 굶어죽어도 지방정부는 이를 감추기에 급급할 뿐 중앙정부에 보고하지 않았다. 지방정부가 중앙정부에 기근을 보고하면 도리어 우파로 몰려 처벌을 받는 일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기아 속에서도 지방정부는 중앙정부에 거짓 보고를 통해 생산량을 계속 늘렸다. 허난성(河南省)의 1958년 실제 식량 생산량은 381억근이었지만, 보고된 생산량은 702억근이었다. 식량의 두 배가 뻥튀기된 것이다. 중국 정부는 이 같은 허위보고를 믿고 농민들로부터 식량을 강제로 매수했다. 사실상의 식량 강제 매수 과정을 통해 농민들이 가지고 있는 식량은 모두 정부에 빼앗겼다.


공업 역시 별반 차이가 없었다. 제대로 된 설비 투자도 없이 국민의 동원만으로 철강 생산량을 불과 3년 사이에 2배로 늘리는 무모한 계획을 목표로 세우다 보니 지방에서는 쇠로 된 농기구와 생활가재 도구를 녹여 철강생산량으로 보고하는 일들이 비일비재했다. 철을 만들기 위해 나무란 나무는 온통 베다보니 산은 민둥산이 돼 버렸다.


이 같은 참상에도 불구하고 서류상의 수치만을 믿었던 중국 중앙정부는 자국민이 굶어 죽고 있는데도 다른 나라 식량 원조에 나서는 일까지 벌였다. 통계에 따라 차이를 보이지만 대략적으로 대약진기간 동안 기근으로 인해 사망한 숫자는 2000만~4000만명에 이를 것으로 추산됐다. 기근 당시 시진핑은 고위공직자였던 아버지 시중쉰(習仲勳) 덕분에 특별한 어려움 없이 이 시절을 보낸 것으로 알려졌다.


◆빗나간 정치투쟁, 문화대혁명= 대약진운동이 참혹한 실패로 끝나자 중국은 시장경제 정책의 일부를 도입하는 등 조정정책을 내놨다. 농업집단화의 규모를 축소하고, 소비재 공업의 성장을 장려하는 정책을 내놓으면서 중국경제는 대약진운동의 상처에서 벗어나는 듯했다.


하지만 내부의 정치투쟁은 더욱 격화됐다. 대약진운동 실패로 인해 공산당 내에도 변화의 움직임이 생겨났기 때문이다. 마오쩌둥이 생각하는 급진적 사회주의 노선의 세력은 약화된 반면 경제조정 정책이 다수의 지지를 얻기 시작한 것이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마오쩌뚱은 부인 장칭(江靑) 등을 동원해 '문화대혁명'이라는 정치투쟁에 나섰다.


문화대혁명의 바람은 거셌다. 실용주의를 내걸었던 공산당과 정부 지도자들은 반사회주의자로 매도되며 체포되고 공산당에서 쫓겨났다. 지식인들도 반혁명분자로 비판받아 농촌으로 쫓겨났는데, 당시 이들 지식인 숫자가 40만명에 이르렀다. 1969년 1월, 16살의 시진핑도 '지식청년'이 돼 산시(陝西)성 옌촨(延川)현 량자허(梁家河)로 내려가 그곳에서 고된 노동에 종사해야만 했다. 현재 중국 권력층으로 발돋움한 '지청(知靑)세대'가 바로 참혹한 성장기를 보낸 이들 지식청년들이다.


문화대혁명은 대약진운동의 참사에서 간신히 빠져나온 중국 경제를 다시금 수렁으로 밀어넣었다. 정치투쟁이 모든 것에 우선함에 따라 공업 생산, 교통 운수 부분에서 차질이 발생했다. 1967년 1487억위안이었던 중국 국민소득은 1968년에는 1415억위안으로 줄었다. 마이너스 성장이었다. 1969년 말부터 문화대혁명은 점차 수그러들었지만, 마오쩌둥 사후 문화대혁명을 주도한 장칭 등이 중국 공산당 원로그룹과 군부에 의해 제거된 뒤에야 공식적으로 종료됐다.


◆개혁ㆍ개방의 길을 걷다= 내부 권력투쟁 과정을 거쳐 최고 권력자로 등장한 덩샤오핑(鄧小平)은 1978년 12월 중국공산당 11기 3차 중앙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중국의 경제정책 방향을 개혁ㆍ개방으로 대폭 수정했다. 중공업 우선의 개발 정책을 폐기하는 대신 균형된 안정성장 노선을 경제정책 방향으로 채택했다. 당시 중국 농촌은 낮은 농산물 가격 정책으로 인해 파탄났다. 도시는 오랜 기간 중공업 위주 정책을 펼쳐온 탓에 생활에 필요한 소비재가 부족했다. 에너지 생산과 교통ㆍ수송 능력이 부족한 것도 중국 경제의 발목을 잡았다.


개혁ㆍ개방 노선에 들어선 중국은 초기에 성장정책을 접어두고, 그동안의 경제불균형을 조정하는 동시에 제한적인 대외개방 정책을 폈다. 일본으로부터 5억엔의 대출을 받는 것을 시작으로 점차 적극적으로 외자 유치에 나섰다. 민영기업, 향진기업의 발전에 대한 규제도 대폭 풀어 사유 경제 요소를 크게 늘렸다. 특히 이 시기 주목을 받았던 곳은 중국 대외 개방이 가장 먼저 이뤄졌던 곳, 시진핑의 아버지인 시중쉰이 당서기로 있었던 광둥성(廣東省)이었다. 광둥성을 시작으로 개혁개방이 본격화 되자 중국은 비상하기 시작한다.


1992년 덩샤오핑은 선전 남부의 경제특구를 방문한 뒤 개혁과 개방을 확대하는 내용의 '남순강화'라는 담화문을 통해 사회주의 시장경제론을 주장했다. 사회주의 시장경제는 다중적 소유구조, 완전한 개방적 시장체제 형성, 거시적 규제의 도입 등을 담았다. 사회주의와 시장경제 병립이 가능하다는 주장이다.


개혁ㆍ개방 이후 중국은 빠른 경제 성장세를 보였지만 부작용도 여기저기에서 나타났다. 경기과열 양상을 보이면서 인플레이션이 발생했으며, 부정부패와 황금만능주의 풍조가 사회 불안요인으로 커졌다. 정치개혁의 목소리도 대학생을 중심으로 터져나왔다. 1989년 공산당 내 개혁파였던 후야오방(胡耀邦) 전 총서기의 사망을 계기로 텐안먼 사태가 벌어졌다. 텐안먼 사태 당시 35살이었던 시진핑은 푸젠(福建)성의 가난한 지역 닝더(寧德)에서 지역 부패세력과 싸우고 있었다.




나주석 기자 gonggam@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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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5.11.0614:16
    김준일 "윤, 여론·재판에서 모두 망했다" VS 강전애 "윤, 피고인으로서 계산된 발언"
    김준일 "윤, 여론·재판에서 모두 망했다" VS 강전애 "윤, 피고인으로서 계산된 발언"

    ■ 방송 : 아시아경제 '소종섭의 시사쇼'(월~금, 오후 4~5시)■ 진행 : 소종섭 정치스페셜리스트 ■ 연출 : 이미리 PD■ 출연 : 강전애 전 국민의힘 대변인, 김준일 시사평론가(11월 5일) 소종섭 : 이 얘기부터 좀 해볼까요? 윤석열 전 대통령 얘기, 최근 계속해서 보도가 좀 되고 있습니다. 지난해 국군의 날 행사 마치고 나서 장군들과 관저에서 폭탄주를 돌렸다, 그 과정에서 또 여러 가지 얘기를 했다는 증언이 나왔습니다. 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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